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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도님의 서재
  •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 김경욱
  • 9,900원 (10%550)
  • 2011-09-30
  • : 481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불문하고, 장편보다는 단편을 선호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짧은 단편 안에 모든 것을 배열하고 끝맺는다는 것이 내게는 꽤나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내가 끈기가 없는 편이라, 장편이나 몇 권으로 이루어진 긴 이야기(예를 들면 <태백산맥>이나 <토지>같은)는 중간에 어디론가 주의력이 흩어져 버린다는 이유도 단편 선호에 한 몫을 한다. 또한 정조(情調, mood)에 대해서는, 역시 밝은 쪽보다는 어두운 쪽을, 문체 면에서는 수식이 많은 만연체보다는 지극히 건조한 문체를 선호하는 편이다. 어두운 내용의 책만 자꾸 읽으면 울증이 심해진다는 의견도 있지만, 묘하게도 나는 반대로 밝은 분위기의 책을 읽으면 '그래, 나는 이렇게 당신들(등장 인물들)과 달리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하는, 모종의 반발심이 들고 내 자신이 더욱 싫어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어두운 분위기의 책을 읽으면 '이것이 실제가 아니라 다행이다. 나의 실제 삶이 이렇게까지 지독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하는, 일종의 안도의 느낌을 받는다. 얼마 전 출간된 김경욱의 단편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도 그러한 어두운 정조를 드러내는, 하드보일드하고 건조한 문체가 특징인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문학을 전공했고 순문학을 꽤나 사랑하는 입장이지만, 사실 김경욱의 작품은 처음이다. 그를 특별히 싫어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몇몇 작가들의 책을 깊게 파는 스타일이라(순문학 작가들 중 배수아, 박민규, 천운영, 김숨, 김연수, 편혜영, 전경린, 김이설의 거의 모든 책들을 나는 갖고 있다) 그 테두리 안에서만 머물렀던 것이다. 수많은 우연과 필연을 거쳐서 김경욱의 단편집은 내게로 왔고, 처음에는 생경함과 정체 모를 약간의 불편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단편들을 하나씩 읽어 나가며 그의 스타일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기에 전작들과 비교해서 어떻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의 등단작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소설집의 첫 작품이자 표제작인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하드보일드적 색채가 강렬한 작품이다. 같은 반 남학생들에게 집단성폭행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말을 잃은 초등학생 손녀와 곧 헐릴 재개발 지역에서 단둘이 살아가는 주인공은, 이미 전기와 가스가 끊기고 지병으로 인해 직업까지 잃을 상황이지만 가해자 부모들이 제시하는 보상금을 거부하고 치밀한 복수를 준비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건 복수는 그를 둘러싼 철벽과도 같은 부조리 앞에서 어떤 의미있는 타격도 가하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만다. '어둠은 늘 있었다. 찾아왔다 물러갔다 다시 찾아오는 것은 빛이었다. 사내는 이제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도 몰랐다. 나무처럼, 한그루 나무처럼. 말을 잃은 계집애를 등에 업은 채.(p.33 중 발췌)' 주인공 사내가 처한 상황의 암담함과 그에게서 발산되는 일종의 박력이 서로 맞부딪치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이었다.  

또한 취업 사수생이자 과외교사인 주인공과 유학에 실패하고 돌아온 압구정동 여고생이 등장하는 단편 <러닝 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공포가 작품 전반에 걸쳐 흐르고 있다. 그들이 한강변으로 놀러 갔을 때, 수차례 마주치는 '뱀 문신을 한 사내'와 개를 쇠줄에 묶어 끌고 가는 오토바이 등이 강남 부녀자 납치강도사건 이야기와 교차되면서 긴장감은 고조된다. 하지만 정말로 무서운 것은 뱀 문신의 사내나 오토바이 남자, 강물 속 사내를 향해 돌을 던지는 조무래기 아이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강 건너에는 찍어낸 듯 엇비슷한 아파트가 성벽처럼 죽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난공의 요새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강은 성벽으로의 접근을 차단하는 해자일 테지. 저 깊고 넓은 해자 건너, 저 단단하고 높은 성벽 너머에 은재의 집이 있다.(p.52 중 발췌)' 부유층의 거주지가 높디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난공의 요새'임이 강조되는 가운데 그 성벽 바깥에서 성벽 내부의 삶을 선망하는 주인공 역시 한편으로는 절대 성벽 안으로 진입할 수 없는, 외부인이자 잠재적 범죄자나 마찬가지임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이는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주인공이 마지막 부분에서 뱀 문신 사내에게서 도망치려 오리배를 타고 강 건너 남쪽으로 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결코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러닝 맨>의 연장선상에서, 1퍼센트를 향한 일종의 속물적 욕망에 대해 다루고 있는 <99%> 역시 꽤 의미심장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최대리는 어느날 갑자기 스카우트되어 회사에 나타난 해외파 '스티브 킴'에게 심한 열등감과 위기감을 느낀다. 그럴수록 그는 스티븐 킴이 사실은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전학간 학교에서 2등으로 끌어내렸던, 아버지도 누군지 모르고 어머니가 술 장사를 했던 김태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힌다. 마지막 부분에서, 과연 김태만에게 있었던 닻 모양의 문신이 스티븐 킴에게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 소설 속에 언급되지 않는다. 일종의 열린 결말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스티븐 킴과 김태만의 동일인물 여부보다도, 그에 대한 최대리의 의심이 어쩌면 그를 향한 질투와 선망이 낳은 일종의 허상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1퍼쎈트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99퍼쎈트를 공략하는 거죠. 1퍼쎈트를 질시하면서도 거기 끼고 싶어 안달인 99퍼쎈트 말입니다. 우리는 그 이율배반적인 욕망의 뇌관을 건드려주는 겁니다.(p.95 중 발췌)' 일종의 미스테리적 장치들을 통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을 되돌아보게 하는 수법이야말로 그의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장기라 할 수 있다. 

그 외의 단편들 역시, 출구가 없는 빈곤한 삶에 짓눌린 삼대의 삶을 담담하게 묘사하거나(<태양이 뜨지 않는 나라>), 결코 생각처럼 낭만적이거나 멋지지 않은 유럽 투어 가이드의 길고 고단한, 그리고 초조하기까지 한 하루에 대한 이야기거나(<혁명기념일>),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소통이 부재했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아버지의 부엌>) 등, 이 책에는 잔혹하거나 혐오스러운 장면이라고는 결코 등장하지 않음에도 왠지 모르게 불편함이 느껴지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등장인물들이 정말 지독하게 암울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뿐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두 번째 읽으니 어느 정도 그 이면이 보이는 느낌이다. 어두운 분위기나 건조한 문체 등을 평소에 자주 접했거나 선호하는 편이라면 이 작품집에 높은 점수를 주겠고, 주로 밝은 분위기의 작품을 선호하는 편이라면 결코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을 것 같다.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듯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많이는 아니고, 약간은 마음에 들었던 단편집이다. 여담이지만 책의 표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작품들 전반에 흐르고 있는 음울함과 건조함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의 초기작은 어땠을지, 매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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