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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기 선생 1951~2024,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직접 불렀다. 김민기 선생이 직접 부른 노래로는 '상록수'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인이다. 가을 편지는 최양숙 선생의 손을 들어드린다. 김민기 선생님, 죄소송~ . 김민기 선생은 언(言)과 행(行)의 궤적이 일치했던 一人이다. ]]] 


작았던 괴물이 자신의 작품을 등에 업고 덩치가 커졌다. 그러자 권력이 생겼다. 권력이 생기자 함부로 행동하고 죄책감없이 더 나쁜 짖을 저질렀다. 그 권력 앞에서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런 괴물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된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작품이 살아있는 한, 누군가는 그를 저주할 것이다. 이것은 괴물에게 주는 또다른 벌이다. 

노털상을 발표하는 날이 되면 카메라를 든 대한민국 기자들은 파카를 입고 밤새 괴물의 집 앞에서 장사진을 쳤다. 행여나 한림원이 그의 이름을 불러줄까 기대를 하면서. 매년 그랬다. 물론 매년 기자들은 허탕을 쳤다. 
다행히, 최영미 선생의 시에 등장하는 그 괴물이 노털상을 받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 최영미 선생이 이 세상을 떠나 살아야하는 진짜 더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참극이 발생했더라면, 고상하고 우아한 나의 입술로 더러운 욕설을 터트려 내 입을 내 스스로 더럽혔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한림원의 탁월한 선구안 덕분이 아닐까 추억해본다. 이참에 스웨덴의 한림원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최영미 선생의 시는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로 끝을 맺는다. 시인의 고뇌와 무기력을 담은 시문이다. 그 괴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잡았을까?  잡지 못했을까? 잡지 못했다. 아니 잡지 않았다. 쉽게 말해 그냥 놔준셈이다. 시인 최영미의 '괴물'은 영화 속의 '괴물'이 한강을 유영하듯 큰 어려움없이 사회를 휘저으며 유영했다. 잠시 숨죽이고 있다가는 다시 언제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우리 사회는 왜 그 괴물을 잡지 않았을까.....영화 속의 '괴물'과 '물괴'는 잘도 잡던데, 정작 우리 사회 현실 속의 괴물은 어찌 잡지 못한 것일까. 영화 속에서 백날 괴물을 잡으면 뭣하나!! 현실에서는 괴물이 활개를 치고있는데!!



일반적으로 카르텔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권력에 상처를 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권력과 계급 의식 그리고 우월 의식에 상처를 내는 일은 자신들의 손실과 등가물이다. 결과가 가져올 손익 계산서를 바라보면서 방관과 침묵으로 일관한다. 언(言)과 행(行)의 궤적이 불일치하는 이유이다. 



괴물을 잡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까. 다들 뻔히 잘 알고 있는 결과를 발생시킨다. 괴물이 새끼를 낳고 또 새끼를 낳아 사회를 전보다 더 더럽히게 되어있다. 시인 최영미 선생처럼 이 더러운 세상을 떠나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된다.



시인 최영미 선생이 뜻을 결단하기에 이르른 것에는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괴물'을 발표하기 전까지 곪고 곪았다는 뜻이다. 최영미선생은 10년 전에 썼어아할 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최영미 시인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다른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20년 전에 썼어야할 시였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괴물의 덩치가 커지자 박선생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결국 곪아 썩은 부위를 시인 최영미 선생이 바늘로 아주 살짝 건드렸고 그리하여 풍선보다 더 커진 고름주머니를 터트린 것이다. 혼자서 총대를 멘 시인 최영미 선생, 과연 대한민국 문단은 이 한 사람에게 총대를 메게 할 일이었던가?



최영미 선생의 시 중에서 가장 빡이 치는 대목은 맨 마지막이다.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 독백인가. 시인은 덩치큰 괴물과 홀로 마주하고 있다. 보나마나 시인은 그 덩치큰 괴물을 감당할 힘이 없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라고 말하고는 얼른 도망쳐야 할만큼 무력한 사람이었다. 시인은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도망쳤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말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자신을 편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무력감을 저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무력감인가. 맨 마지막은 "곧 사람들이 도우러 몰려오겠지, 조금만 버텨보자!!" 라고 써있어야 할듯 한데, 그렇지가 않다. 시에서 최영미 선생의 희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는 고독감, 무력감, 희망 없음이다. 이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괴물이 살고 있는 동굴의 벼랑끝에 시인 혼자 서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에 빡이 칠 뿐이다!  



보다못한 시인 류근이 SNS를 통해 그 괴물에게, 아니 우리 사회에 직격을 날렸다.

류근이 쓴 글의 제목은, 아 다들 '몰랐다고?' 이다. 다음은 류근이 빡이쳐서 SNS에 게시한 글이다.



"몰랐다고?


고은 시인의 성추행 문제가 '드디어' 수면 위로 드러난 모양이다. 최영미라는 시인께서 지난 가을 모 문예지의 페미니즘 특집에 청탁받아 쓴 시가 새삼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이다. 놀랍고 지겹다.


6~70년대부터 공공연했던 고은 시인의 손버릇, 몸버릇을 이제서야 마치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소스라치는 척하는 문인들과 반응이 놀랍고, 하필이면 이 와중에 연예인 대마초 사건 터뜨리듯 당하는 듯한 정황 또한 지겹고도 지겹다.


솔직히 말해 보자. 나는 한 번도 끼어들지 못한 소위 '문단' 근처에라도 기웃거린 내 또래 이상의 문인들 가운데 고은 시인의 기행과 비행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 얼마나 되나.


심지어는 눈앞에서 그의 만행을 지켜보고도 마치 그것을 한 천재성이 끼치는 성령의 손길인 듯 묵인하고 지지한 사람들조차 얼마나되나. 심지어는 그의 손길을 자랑스러워해 마땅해야 한다고 키득거린 연놈들은 또얼마나 되나."


침묵한 문인들이여!!!  반성하라!  


시인 류근의 글로 판단하건데, 저 글을 그자리에서 일 순간에 갈겨쓴 글일 것이다. 류근 시인이 빡이 친 만큼, 빡이 친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게다가 위 글은 다듬어지지 않았다. 류근은 시인이다. 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글을 전혀 다듬지 않았다. 이 말은 순식간에 일필로 갈겨썼다는 뜻이다. 그리고 갈겨썼음을 숨기지 않고 자신이 얼마나 빡이 쳤는지를 고스란히 전달한 것이다. 그 마음이 내 마음에 든다 진짜!!!  






[[[ SNS에 글을 써준 류근 시인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이 노래의 가사는 류근 시인이 쓰고, 고 광석형이 곡을 입혔다. 광석형의 노래야 말할 필요가 없음을 잘 안다. 그리고 박새별도 커버를 했는데....1절은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2절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별처럼 빛나는 박새별의 2절 노래는 광석형의 노래를 순간 잊게 만든다. 나는 박새별이 부르는 2절 때문에 이 노래를 듣는다. 물론 지극히 사적인 생각일 뿐이다. ]]]


   

침묵은 금(金), 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을 적이 있다. 분명 침묵이 금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침묵이 사회를 병들게 할 수도 있다. 침묵은 그 특성상 결코 중립일 수 없다. 침묵은 어쩌면 적극적인 동조이자 협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불의에 가해지는 침묵은 적극적인 협조이자 동조이다.


그 결과 수많은 문인들의 침묵은 작았던 괴물을 덩치큰 물괴로 만들었다. 시인 최영미선생이 입을 다문 박선생을 분명하게 지적해준 이유이다.


방관은 결코 방관이 될 수 없다. 방관은 가해와 등가이다. 그리하여 방관은 동조이며 협력이다. 방관은 비난을 받을 자격이 있다. 



노래 듣다가 2017년 있었던 일로 빡이치는데 너무 뒤늦은 북이라 뻘쭘하기는 하다 ㅠ

그러나 가을 편지를 들으면 나의 뇌리 속에서 그 물괴가 스믈스믈 다시 기어나오니 어쩌겠는가....  

때로 침묵은 결코 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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