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노래를 들으며 외국어 공부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외국어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때 였고, 노래의 가사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다. 노래가 마음에 들면 자주 듣게되고, 그럴수록 그 가사와 음반의 내지에 써있는 내용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그러다보니 덩달아 웃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시작했기에 지금 생각해봐도 무모한 결정이었다.
어쩌다가는 학부때 타학과 전공을 3과목 수강한 적이 있었다. 철학 아리스토틀, 서양 음악사 그리고 프랑스어 였다. 철학과 수강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빠져버린 친구의 꼬임에 넘어간 덕분이었다. 강의가 시작된 후에 알게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원서라는 사실을 알았다. 망했다. 반면 서양 음악사와 프랑스어는 오로지 음악에 대한 관심도에서 비롯된 자발적 행위였다.
당시 나는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공부를 틈틈이 독학으로 시도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거창한건 절대 아니었다. 독학인데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마치 K-pop을 들으며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가사가 없는 고전 음악을 더 많이 듣기는 했지만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된 오페라 아리아와 가곡들도 곧잘 들었던 때였으니 말이다.
독일어는 고등학교에서 2외국어였고, 아주 쬐끔 알고 있었으므로 혼자서 공부할 정도의 독일어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작정하고 덤비는 공부가 아니니 가벼운 마음으로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배워봐야지 했던 것이다.
문법 구조는 관련 책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발음은 책으로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이탈리아어의 발음을 익히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가사를 보면서 노래를 몇 곡 들어보면 누구나 발음 규칙을 익힐 수 있는 정도였다. 철자가 곧 발음이나 다를바가 없는 언어가 이탈리아어 였다. 그 덕분에 이탈리아어는 뜻밖에도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어는 경우가 달랐다. 발음에서 큰 난관에 부딪혔다. 프랑스어의 문법구조는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으나 발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살펴도 발음 규칙을 발견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음성 정보가 없었기에 발음 기호를 봐도 영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소리를 내라는 것인지 그 의도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또한 알파벳 철자를 멀쩡하게 써놓고도 발음을 하지 않는거다. 예를 들어 'Hodori' 라고 쓰고, 읽기는 '오도히' 라고 읽는 식이다. 철자 'H'를 쓰되 발음은 하지 않는다. 하... 그렇다고 '히(ri)'가 '히(ri)'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히(ri)' 아닌 '히(ri)' 인것이다. 고등학교때 프랑스어를 배워본 사람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아실 것이다. 그러나 경험이 없던 내가 이 '히(r) 아닌 히(ri)'를 절대로 알 수가 없었던 거다.
다른 경우는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연음은 또 프랑스어의 예술이나 다름이 없다.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난관을 만난 것이다. 결국 나는 교양 과목으로 프랑스어 기초를 목표로 1학년 문법 강의를 신청하기로 했다. 학점은 F라는 최악의 상황을 면하는 것으로 하고, 전공생들에게 발음 동냥으로 얻어 알고 문법도 좀 더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그렇게 낯선 프랑스어와의 힘겨운 2학기가 시작되었다.
수강을 하면서 프랑스어의 연음을 '리에종Liaison' 이라 하고, 그 규칙을 따로 정해 놓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리에종(Liaison)에 따르면, 연음을 반드시 해야하는 경우, 연음 하지 않는 경우, 선택적 연음을 하는 경우 등의 규칙이 있었다. 정보가 부족했던 당시에 이런 사실을 알리가 없었다.그리하여 학기가 끝이 날 즘에서야 발음을 자연스럽게 입에 붙일 수 있었다. 그런데, 발음을 입에 붙이는 시간이 한 학기라니... 프랑스어는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이건 뭐 상당히 모자란 결과인데... 하면서 학기를 그렇게 마쳤다.
어째거나 기말고사를 끝내고, 어느 추운 날, 집으로 전화가 왔다. 직접 받지는 못했지만 프랑스어 학과 사무실로 좀 나와줘야겠다는 불길한 호출 전화였다. 불길한 예감은 대부분 적중률이 높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음 날 오후 프랑스어 학과 사무실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아니나 달라, 담당 교수님이 중간ㆍ기말 고사 시험지 두 장을 앞에 내밀며 내게 말했다. "이게 학생의 시험지 입니다. 타 학과 학생이 이러는게 황당한 상황인데, 권총 차고 재수강 할래요 아니면 D로 끝내고 good goodbye 할래요?" 하고 물었다. 소르본느에서 유학했다더니 프랑스의 고급진 예절을 배우셨나, 교수님은 학생인 나에게 존대어를 썼다.

[[[ 내지가 프랑스어로 되어있는 줄 알았는데 막상 상품을 받고보니 영어로 되어있었다. 대 실망이었다 ㅠㅠ ]]]
시험지 채점을 보니 겨우 정답의 반타작을 면한 결과였다.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 변명을 좀 해볼까 하다가는, '이건 칼날을 잡은 놈의 자충수지!' 생각하고는 마음을 바꿨다. 그러자, '질문이 사내답네' 로 생각이 바뀌었다. 다시 교수님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너 시험 중간 기말 둘다 개판쳤어 지금, 알지? 하지만 빵꾸는 안낼게, 골치아프게 하지 말고 D먹고 전공 수업에서 떨어져줘!' 뭐 이런 시추에이션인거였다. 철학과 교수님도 다음 학기에는 좀 빠져주겠니 하시더니 그 소리를 또 듣는거다.
교수님이 내민 선택지에 고민하고 있는데, 해당학과 조교가 난로 옆에 앉아 불을 쬐면서 힐끔 힐끔 내 쪽을 쳐다봤다. 출근해서 난로만 껴안고 앉았는지 난로의 열기에 조교의 얼굴이 익어 홍시처럼 벌갰다. 반면 나는 쪽팔려서 얼굴이 벌개졌다.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연한 목소리로 질문에 답했다.D로 끝내주십시요 교수님!!속으로는 선택권을 준게 어디야 했지만 내게 사실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고, 일단의 목표를 이룬 셈이니 이걸로 끝내자 뭐 이런 결론이었다.
교수님이 말했다, '좋아요. 근데 타과 학생이 프랑스어 전공 수업은 왜 들었는데요? 처음이라 진짜 궁금해서 묻는거에요.' 교수님의 얼굴을 보니 진짜 궁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래서 있는 사실대로, '문법은 책으로 어찌 해보겠는데, 발음은 독학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교수님', 했다. 교수님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또 물었다, '발음을 배우려고요?' 나는 '네', 하고 짧게 답했다.이런 내 모습에 난로 앞에서 불쬐며 듣고있던 조교 이자쉬기 갑자기 고개를 홱! 숙이더니 풉! 하고 뿜어버렸다. 순간 나의 무능력을 절감하며 알량하고도 엉뚱한 감정이 솟아 올라 속으로 나는, '조교 이자쉬기, 아놔~' 했다.
이 모습에 재미졌는지 교수님이 갑자기, '조교야, 너는 왜웃냐 근데? 지금 심각한거 안보여?' 하면서 자기도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뿜어버렸다. 순간, 속도 없는 나도 아하하 웃어버렸다.그러자 교수님이 계속 삐질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조교에게 빨간펜을 건넸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이 시험지, 75점 줘라~!' 이랬다. 아... 순간, 교수님이 내가 잘 아는 친척 형처럼 느껴졌다. 조교는 네? 했다. 다시 교수님이 '75점 주라구 조교야~' 했다. 그러자 네~ 하면서 여전히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그 빨간펜으로 커다랗게 75라고 쓰고, 두 개의 굵은 밑줄을 점수 밑에 힘껏 지직~! 하고 그어버렸다. 그리곤 나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는 것이었다. 순간, 하마터면 나는 조교에게, '야, 우리 친구하자' 이럴뻔 했다. 순식간에 빵꾸에서 D, D에서 C학점으로 돌변하니 밉상이던 조교의 미소가 어찌 그리도 싱그럽던지... 진짜 속 없는 놈이 바로 나였다.
소르본느의 예절을 갖춘 교수님이 내게 악수를 청하며, '이제 우리 그만 봅시다~' 하길래 나는 속으로 '그럽시다요~' 하면서, 겉으로는 미소띤 얼굴을 하고 입으로는 '고맙습니다 교수님~' 했다.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오면서 나는, 그 멋진 조교를 향해 손을 들어 흔들며 '메르시 보꾸 merci beaucoup!' 했다. 이번엔 조교가 나를 향해, '아하하' 했다. 그리고 혼잦말로, 대학교에서도 빨간펜을 쓰는구만! 근데 밑줄 2개를 왜 긋는 거지? 생각 했다.
그나저나 남들은 A뿔 받고도 시큰둥인데 나는 C제로 받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다 이거지! 그렇게 친척 형님같은 교수님의 통큰 결단에 나름 기분좋게 프랑스어 학과 사무실을 나오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그것은 바로 훈민정음의 서문 중 "새로 스물 여덟자를 맹가노니" 였다. 그나저나 나머지 네 글자는 어디 갔지?
권총 찰뻔한 위기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쉰 후 생각에 잠겼다. 수강 후 얻은 결과로는, '메르시 보꾸'는 사실 '메르시 보꾸'가 아니다. '메르시'는 '메르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르 r'에서 가래가 살짝 끓어줘야하지만 듣기에 거북해서는 안된다. 거칠면 촌티 발음이 나니까. 되려 부드럽고 듣기 좋은, r음에 h음을 살짝 얹어서는 두 음이 합성된 가래끓는 소리? 를 동시에 내줘야 한다. 그 소리가 있어 프랑스어 발음은 우아해진다. 가래끓는 소리가 있어 우아해진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프랑스어 발음의 예술은 ' r '에서 결정 난다고 보면 된다.
어째거나 우리 언어로는 프랑스어 발음의 온전한 표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사라진 4글자였던 것이다. 그 전까지는 아쉬울게 없으니 사라진 네 글자를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상황이 그러하다보니 아쉬워진 것이었다. 물론 사라진 4글자를 복원시킨다 해서 프랑스어의 발음을 모두 표기하고 정확하게 재현해낼 수 있는지 여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당시엔 다만 있던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발로일 뿐이었다. 만약 사라진 4글자를 복원시킨다 해도 한글 자판과 스피드 시대의 현 상황에 잘 적응할지는 또 장담할 수가 없다. 고등학교 때 사라진 4글자를 배운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이미 잊어버려서 말이다.
설에 고향에 다녀오며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어로 된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옛 생각이 나서 일이 이렇게 되었다. 여하튼 나는 C학점에 대만족하는 학생이었다. 그 미소가 싱그럽던 조교는 지금 학과장 하고 있으려나... 살짝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