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에 어울리지 않게 7~80 대의 허파를 가진 친구와 20대에 어울리게 팔팔한 허파를 가진 나, 모두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군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확실히 입대를 한 젊은이들의 그 피는 정말 순도 높고 팔팔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그 젊은 피를 탐하는 기관이 있는데, 바로 적십자 혈액원이다. 부대 위치가 또 서울이어서 그런지, 헌혈 차량이 도대체 1년에 몇 번을 오가는지 모른다. 하여튼 뻔질나게 다녀갔다. 전방과 예비 사단 출신들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을 지경이다 진짜. 헌혈 횟수를 세다가 그만 잊어버릴 정도 였다. 적십자 혈액원은 그렇게 한번 오면 군바리들의 피를 몇 트럭 씩 싣고 가면서, 군바리들에게 던지고 가는 것은 과자 한 봉지와 애플 쥬스 한 팩이 전부다. 헌혈 기관 관계자는 그 얼마나 뿌듯 했을까. 
 
군바리는 단지 국방의 의무만 다하는게 아니다. 상대방(적십자)이 원할 때마다 혈액 공급원이 되어주어야 하고, 헐값된 농산물도 먹어줘야 하며, 조류 독감이 유행하면 닭고기를 물리도록 먹어줘야 하고, 돼지 전염병으로 소비가 줄어 돼지 값이 폭락하면 군인들이 그걸 먹어줘야 한다. 코로나 유행하면 제일 먼저 시범타 접종을 해야하고, 재난 지원 및 농사 지원도 나가줘야 한다. 그러다가는 불행하게도 채상병께서 순직하신 것이다. 전쟁이 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말할게 뭐있나! 공격 앞으로!!!! ))
각설하고, 다들 그러하듯 휴학을 하고, 집으로 가서는 조신하게 입대를 기다린다. 고향인 동쪽 멀리에 있는 경상도 깊은 산골로 돌아간 친구, 그와는 정 반대 방향의 머나먼 서쪽 깊은 산골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서로 연락할 길이 없었다.
당시 깊은 산골 가정 집에는 전화기라는 것이 없었다. 전화기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지금이야 개인이 각자 전화기를 휴대하는 시대이고, 어떤 이는 2~3개의 전화기를 가지고 있는 시대가 아니던가. 시대가 그러하다보니 가정집의 전화기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전화기가 넘쳐나서 되려 가정집 전화기가 불필요해진 현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내 고향을 기준으로 하면, 마을 이장님 집에 한 대의 공용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전화가 걸려오면 이장님이 확성기에 대고 한 시간 후에 아무개에게서 전화가 올 것이니 와서 대기하라, 고 방송을 했다.
먼 논 밭으로 일을 나가거나 외출이라도 하게되어 방송을 못듣게되면 도회지에 나가 있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위해서 다음 날을 기다려야 하던 그런 시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골의 찢어지게 가난 농부들에게 전화비는 상당한 비용 지출이 될 수 있었다. 전화 통화를 전보치듯 요점만 말하고는, 뚝!! 안녕하시오, 잘있으오, 잘계시오, 이런 인사는 비용으로 청구되기 때문에 잘라먹을 수 밖에 없던 시절. 한마디로 인사 값을 지불해야 하는 시절 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온 안사람은 이런 나의 환경을 먼나라 이웃나라 딴나라 이야기처럼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전기가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보급되었다고 말했더니, 안사람은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지만 안사람은 현대에 살고 있었고, 나는 신석기도 아닌 구석기 시대를 살고있었던 것이다. 나이가 비슷하다고, 같은 나이라고, 같은 시대를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보여주는 팩트 스토리이다.
또 어째거나 절친과 나는 그렇게 연락이 두절된 채로 각자 입대를 하게되었다. 절친도 당연히 입대하였겠거니 했다. 드디어 입대를 하고 국가를 위해 뺑이를 치던 중, 나는 총을 잘 쏘는 바람에 어느 날 특박을 나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