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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한 성공
  • 윤홍식
  • 18,000원 (10%1,000)
  • 2021-08-30
  • : 798

1.

윤홍식 교수는 복지정책을 다방면으로 연구한 학자로, 복지정책을 세분화해 가족정책, 여성정책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복지정책이 어떻게 국가에 수용되는가 하는 과정 측면이나 권력분립이 주는 영향 등의 변인은 물론, 복지정책의 역사적 측면을 살펴보는 등 양적 연구 이외에서도 많은 성과를 내놓았습니다. 특히나 여러 방면에서 복지라는 개념을 보고자 하는 시도와, 그에 걸맞은 다양한 변인을 설정하는 인사이트가 돋보입니다.

윤 교수는 제작년 사회평론아카데미 출판사에서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 1–3»을 출간하며 복지정책에서 'histoire des mentalités'를 어떤 식으로 적용하는 것이 옳은지 보였습니다. 해당 저서가 분명히 학술서인 반면 이번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이상한 성공»(2021)은 설명하는 어조나 어투부터 정말 한국이 "왜 불평등한 복지국가가 되었을까?"를 궁금해 하는 일반인과 대중을 위한 책임이 분명합니다. 누군가는 한국이 "복지국가"라는 점에 부동의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또 한국이 "불평등한 복지국가"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상한 성공»은 단호합니다. 한국의 경제학적(특히나 GDP 측면에서) 성공은 "이상한 성공"이며, 한국은 "불평등한 복지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본래 개념이 책의 서두에 나오면 당연스레 그 '개념' 혹은 '정의'와 그것이 정립된 역사가 나오게 됩니다. 이 책 역시 그러한 구성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만, 저자가 서술하는 '역사'는 조금 더 진중하고 분석의 깊이가 남다릅니다. 윤 교수는 10년에 걸쳐 한국의 정치상황과 복지정책의 발전 관계와 각종 상관관계에 대해 분석한 논문을 출판했고, 이를 다시 깁고 다듬어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윤 교수가 존댓말로 친절히 알려 주는 한국의 복지정책과 복지국가론에는 그 서사와 맥락을 무시하고 제도적 측면을 다뤄선 안 되겠다는 일성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왜 이런 책을 출판해야 하고, 이런 태도를 지향해야 할까요? 윤 교수 자신이 사회참여적인 학자인 것은 하나의 이유일 뿐입니다. 복지정책의 수혜자이자 정책입안자이기도 할 독자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정책을 위해, 좋은 국가를 위해, 또 나와 가족과 우리 공동체를 위해 더욱 참여하고 소리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을 위해 저자는 우리의 생각에 친절히 개입합니다.

그 좋은 정책이 무엇인지, 좋은 국가가 무엇인지, 왜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15장에 걸쳐 담아내며 완결성을 추구했습니다. 특히, 좌우 일각에서 나오는 (586) 세대론에 대해서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는 말을 통렬하게 한편으론 세련되게 반박하며 문제의 본질은 "계급 불평등"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86세대 중 출세한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마치 1960년대에 태어난 50대가 모두 대학을 졸업해 좋은 직장에 다니면서 높은 지위에 있고, 높은 소득과 부를 독점했다고 묘사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심각한 계급 불평등을 세대 불평등으로 감추려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 p.40.

저는 이 부분에서 (1) 세대별 소득과 부의 격차와 그것에 선행하는 지표 중 하나인 (2) 교육불평등과 (3) 현재와 비교할 때의 절대적 소비력 격차에 따른 삶의 질 (QoL) 등을 이야기하지 않고도 무엇보다 간명하게 86세대 책임론을 논파해낸 점에 놀랐습니다. 저자의 말처럼, 세대론에 모든 책임을 돌리려는 시도는 잘못되었고, 나아가 제가 보기에는 문제의 직접적이고 주요한 원인에서 눈을 떼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지 않나 하는 의문까지 들게끔 합니다.

누군가는 모든 것이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하는 극소수 (보수적) 86세대 사람들에 대한 반동적 성격에서 나온 말이 86세대 책임론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틀렸다고 반대급부에서 86세대 책임론이 맞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둘 다 틀렸다는 것 또한 책에선 상세히 다룹니다. 요 근래에 들어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국장학재단에 따르면, "서울대 학생의 70%가 고소득층 자녀라고 합니다". SKY 학생 중 정시 비율을 보면 이러한 학생 가구의 소득 격차와 관계가 있다는 무참한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즉, '노력' 이전의 문제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또 다른 참혹한 통계는 9월 10일자 경기신문에 실린 곽노현 전 교육감의 기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실의 영재학교에는 ‘타고난 영재’들이 아니라 ‘만들어진 준재’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가장 확실하고도 충격적인 증거는 서울과학고, 경기과학고 등 수도권 3대 영재학교 재학생의 절반이 강남의 특정학원 출신이라는 점이다. 영재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4~5년의 치밀한 준비기간과 최소한 7~8000만 원의 사교육비가 필요하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만한 시간과 비용을 쓸 수 있고 유명학원에 가까이 사는 수도권, 특히, 서울 강남의 부유층에 유리하고 농어산촌가정과 저소득층가정의 ‘숨어있는 장영실’들에게 불리하단 뜻이다."

위 사실은 과학고-영재학교 재학생이나 학부모라면 '공공연한' 일인데다 해당 집단의 대다수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그룹의 밖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거나 입막음당하고 있으니 실로 '비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학생을 선발한다 하는 것은 다른 요인을 제하고 그 성장가능성을 보고 입시에 반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학생이니까요. 인재를 키워낸다는 것은 지금 수학 과학 문제를 남들보다 조금 잘 푼다는 현재의 '실력'과는 무관하니까요. 그러나 전혀 그렇게 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잔인한 방증입니다.


"진짜 영재는 하늘의 선물이라 부모나 지역, 성별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분포할 게 틀림없다. 진정한 의미의 영재라면 소득상위 10% 부모 아래서도 10%가 나올 것이고 소득하위 10% 부모 아래서도 10%가 나올 것이다. 지역적으로도 서울이나 강남이 인구비례보다 훨씬 많을 리 없고 농어산촌이 인구비례보다 더 적을 리도 없다. 지금처럼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을 리도 없다. 요컨대, 타고난 영재만 뽑는 족집게 영재학교라면 그 학생 구성이 지역별, 계층별, 성별로 지금처럼 편중되지 않고 고르게 분산되어야 맞다."

곽 전 교육감은 이러한 입시 방법에 대해서 어떠한 대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영재학교와 과학고를 폐지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해결책을 내놓지도 않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으니 그 원인을 찾아내고자 통계를 먼저 확충하자고 합니다. 이러한 당연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때가 있고 아닌 때가 있다는 사실은 잔혹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기회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런 배경에 갇혀 있는 사회에서 단발적이고 나이브한 '공정'은 작동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지조차 고려하지 않거나 고려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외치는 '공정'이 의미를 가질 수가 없을 따름입니다. 본디 자유주의가 선망하는 meritocracy 사회는 이렇게까지 불균등한 기회를 전제하고 있지 않습니다. 혹은 현실적으로 기회의 불평등이 문제된다고 해도 사회는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혹은 제도의 수용자가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회가 그러한 합리적이지 못한 제도에 고착되면서 "능력이란 것이 결코 선천적인 것이 아닌데" 반대로 그렇게 이해되는 경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은 심각히 우려할 만합니다.

한국에서 그러한 생각이 커지고 있는 데에는 역사적 맥락 또한 존재합니다. GDP 성장이 압축적으로 진행되어 아주 빨랐고, 그러한 성장의 단초를 온전히 권위주의 정부가 제공했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각의 파편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진화해 권위주의 체제(와 그 위정자)에 경제성장의 공로를 오롯히 돌리며 하나의 정치적 집단을 단단하게 형성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논거가 사실이 아니며 이러한 연구성과는 다양한 나라에서, 석학들에 의해 증명되었고 또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꼼꼼하게 부연합니다. Hirschman, Sen, de Mesquita, Rajan 등의 연구와 UNDP의 논의 등을 참조해 읽어볼 만합니다. 수출주도 행태, 거버넌스의 역할, 국내법적 제도, 민주화운동이 정치에 주는 영향, GDP 성장 자체가 실제 국민의 삶을 개선시키는가 등 다양한 측면의 이야기가 있는데, 하나의 정답이 있을 수가 없겠죠.



2.

저자의 생각이 일관되고 구체적인 만큼 당연히 동의하지 않는 부분 또한 존재하고 그 또한 명확합니다. 첫째는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입니다. 저자는 복지정책의 방향을 완전한 보편주의로 돌리자고 주창합니다. '복지'를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차이나고 폄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고민에서 나온 답처럼 보입니다. "복지 욕구가 입증되지 않는 사람들을 복지에서 배제하고 욕구에만 기초해 권리를 부여하면, 그 복지국가의 복지제도는 취약계층을 위한 잔여적 복지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재정의한 복지국가에는, "사회권을 부여하는 것을 넘어 시민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시장과 가족의 역할도 고려"돼야 합니다. 이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상위 10%의 효용감을 위한 '친절한 개입'이 효과적이라는 데엔 이론이 상당할 것입니다. 저부터 동의하기 어렵고요. 재난지원금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윤홍식 교수와 대담했던 양재진 교수 편에 더 공감합니다.


"개인에게는 소득보장효과가 미미한 푼돈이지만, 국가적으로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기존 사회보장이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 이번 재난지원금이 사회적·경제적 문제 때문에 주어진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지금도 고용보험 하에서 실업급여, 고용유지지원금 등 사회안전망의 보호는 작동하고 있습니다. […] 재난지원금으로 인해 방금 말씀드린 ‘사각지대’의 사람들이 결과적으로는 더욱 힘들어진다는 점도 직시해야 합니다. 이번 코로나 경제위기에도 고용유지지원금 같은 사회보장 덕분에 실업률은 4퍼센트 정도에 머무르잖아요. 그러니까 정책 수요 대상도 200만명 정도여야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재난지원금은 실효성이 낮습니다." – '창작과비평, 48(3), 2020-09'에서 부분 발췌.

둘째는 거시경제 지표나 그 성과를 온전히 복지정책으로 돌리려는 시도입니다. 복지정책이 준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는 Atkinson 이래의 연구를 같이 고려할 때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지정책이 얼마나 주요히 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더욱 철저한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저자는 확장재정을 옹호하며 그리스와 아이슬란드의 예시를 들었습니다 (pp.306–316). 하지만 제도주의 학자로서 왜 복지정책에 한정해 국가를 평가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저자는 '아이슬란드는 IMF가 요구한 긴축을 거부했고, 그리스는 받아들였고 그 결과가 다르니 승자가 명확하다'는 식의 서술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수많은 사실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스와 아이슬란드의 산업구조는 다릅니다. 두 국가의 정치체제에 영향을 준 국민들의 여론도 달랐고, 실제 그리스는 갈팡질팡하다 포퓰리즘 정부마저 정책 변동 폭이 대단히 컸습니다. 아이슬란드가 증세를 했을 때 소득수준 별 실질 소득세나 자본세 등이 그리스와 크게 달랐습니다. 세금을 바라보면 대중의 인식도 달랐습니다. 어떠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고, 그러한 목적세적 특성을 가진 재정이 어떤 '선택과 집중'을 거쳤는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저자가 논하는 '보편주의'에도 반하는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공공지출의 경상GDP 대비 규모나 그 비율도 달랐으며 제도적 측면에서 차이는 사실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위기 이후 금융 부문을 어떻게 처리했고, 그 정책의 지속성이 언제까지 유지됐는지 또한 부채 총액의 해당 부문 비율을 고려할 때 아주 중요한 요인일 것입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거시정책인 통화정책을 논하지 않고 문제의 해결책을 복지로 환원시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통화 안정을 위해 어떻게 유동성을 확보했고 그게 어떠한 영향을 줬는지도 이야기했어야 합리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략 끝에 "긴축이 실패한 정책이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연구에서 확인된 내용"이라며 인용 하나 없이 내린 결론도 아쉽습니다.

이 결론을 이용해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대응을 비판하려는 시도는 이해할 수 있으나 앞서 지적한 이유들 때문에 근거가 미약해집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홍 부총리의 재정운용방식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아주 제한적으로 재정을 이용했고, 국채에 대한 과도한 리스크를 추정했습니다. 이는 2019년까지 세출에 대해 온건한 관점을 유지하고 있던 것과 대조되는 지점입니다. 마치 박근혜 정부 시절 40%라는 학술적 근거도 없는 재정건전성 지표를 맹신하고 있던 바보같은 행위를 바라보듯 적어내려간 서술방식은 홍 부총리에 동정표를 주고 싶게끔 합니다. 공적이전소득과 재정승수에 대해서 과연 기획재정부가 아무런 근거 없이 정책을 운용했을까요? 분명히 아닌데 책만 읽으면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조세재정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감세보단 세출 증가가 훨씬 더 GDP에 영향 미친다는 보고서가 있고 한국은행도 정부 지출 재정승수 효과는 2.3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국제통화기금 (IMF) 자료를 보더라도 감세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통계 분석자료가 있다." – 홍남기, 2019-11-05.

마지막은 비례대표제에 대한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자의 전문 분야가 아닌 관계로 말을 아끼려 합니다. 진보당과 리버럴당을 구분할 정도의 정성이었다면, 현실의 진보당이 어떤 계층을 위해 소리를 높이고 있는지도 조금 더 중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p.331의 ‹OECD 회원국의 GDP 대비 이전소득비율과 비례대표성› 그림의 미주에 오타가 있는데, 아무튼 여기서 인용한 Alesina et al.의 회귀분석에서는 GDP 대비 이전소득비율과 다른 변인도 같이 비교했고, 비례대표성의 경우에도 인과가 도출되기보단 다른 정치적 맥락 또한 주요한 이유가 된다는 사실, 정치제도가 가지는 내생성을 고려한다면*, 비례대표성만 비교한 것에서 결론을 의도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소간 듭니다.


*: "Political factors that influence U.S. exceptionalism run deeper than differences in electoral rules.", 결론에서 논문 저자가 주요 factor로 꼽은 "Racial fragmentation", "hostility to welfare", "a stronger connection between effort and earnings" 등.



3.

이 문단부터는 9월 14일(현지시간) 미국 Pew Research Center의 서베이를 보고 적은 것인데요. 저자가 '핀란드 청년들의 고민' 파트에서 한국의 청년들과 핀란드 청년들은 고민하는 게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놀랍지 않느냐. 그 이유가 각 사회 배경에서 비롯한다. 이런 식의 논의에서 책을 출발시켰는데, 양립가능성을 얼마나 고려했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서베이 결과가 나와 아래와 같이 짧게 부연합니다.


핀란드 교육청 관계자가 이곳 청년들도 고민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죠. […] 핀란드 청년들은 '기후위기와 세계평화'를 고민한다는 거예요. […]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핀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손꼽히는 나라이기 때문이죠. – pp.23-24.

"핀란드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의 반경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본" 것인데, 한국은 "자신의 문제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저자를 자문합니다. 그런데 COP26 총회를 앞두고 발표된 어제자 서베이 결과에서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먼저 기후변화가 생애 동안 개인의 삶에도 악영향을 주는 게 염려되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결과를 살펴보면 실로 충격적입니다. 한국은 겨우 11%만이 부정했습니다. 88%는 염려된다고 대답했죠. 기후변화의 영향을 잘 알고 있는 비율(= 긍정 - 부정)은, 조사대상국 중 최고치입니다. 저자가 강조한 "북유럽 청년"들의 국가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는 스웨덴은 무려 56%가 부정하고 겨우 44%만이 염려된다고 밝습니다. 한국(88-11=+77)과 스웨덴(44-56=-12)의 격차는 엄청납니다. 이러한 상관관계를 이루는 요인 중 하나는 정치성향인데요. 스웨덴의 우파는 겨우 27%만이 기후변화의 악영향이 염려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좌파도 57%로 낮은 편이에요. 한국은 각각 84%와 90%로 특이한 양상이죠. 하지만 이런 결과는 "(핀란드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을 인류의 보편적 삶으로까지 연장해서 보니" 같은 서술이 적절치 않다는 충분한 방증이 됩니다.



* 한겨레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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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유하기 2. 저자의 생각이 일관되고 구체적인 만큼 당연히 동의하지 않는 부분 또한 존재하고 그 또한 명확합니다. 첫째는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입니다. 저자는 복지정책의 방향을 완전한 보편주의로 돌리자고 주창합니다. '복지'를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차이나고 폄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고민에서 나온 답처럼 보입니다. "복지 욕구가 입증되지 않는 사람들을 복지에서 배제하고 욕구에만 기초해 권리를 부여하면, 그 복지국가의 복지제도는 취약계층을 위한 잔여적 복지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재정의한 복지국가에는, "사회권을 부여하는 것을 넘어 시민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시장과 가족의 역할도 고려"돼야 합니다. 이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상위 10%의 효용감을 위한 '친절한 개입'이 효과적이라는 데엔 이론이 상당할 것입니다. 저부터 동의하기 어렵고요. 재난지원금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윤홍식 교수와 대담했던 양재진 교수 편에 더 공감합니다. "개인에게는 소득보장효과가 미미한 푼돈이지만, 국가적으로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기존 사회보장이 위축될 수밖에 없어요. […] 이번 재난지원금이 사회적·경제적 문제 때문에 주어진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지금도 고용보험 하에서 실업급여, 고용유지지원금 등 사회안전망의 보호는 작동하고 있습니다. […] 재난지원금으로 인해 방금 말씀드린 ‘사각지대’의 사람들이 결과적으로는 더욱 힘들어진다는 점도 직시해야 합니다. 이번 코로나 경제위기에도 고용유지지원금 같은 사회보장 덕분에 실업률은 4퍼센트 정도에 머무르잖아요. 그러니까 정책 수요 대상도 200만명 정도여야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재난지원금은 실효성이 낮습니다." – '창작과비평, 48(3), 2020-09'에서 부분 발췌. 둘째는 거시경제 지표나 그 성과를 온전히 복지정책으로 돌리려는 시도입니다. 복지정책이 준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는 Atkinson 이래의 연구를 같이 고려할 때 충분히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지정책이 얼마나 주요히 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더욱 철저한 분석과 연구가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저자는 확장재정을 옹호하며 그리스와 아이슬란드의 예시를 들었습니다 (pp.306–316). 하지만 제도주의 학자로서 왜 복지정책에 한정해 국가를 평가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저자는 '아이슬란드는 IMF가 요구한 긴축을 거부했고, 그리스는 받아들였고 그 결과가 다르니 승자가 명확하다'는 식의 서술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수많은 사실이 빠져 있습니다.그리스와 아이슬란드의 산업구조는 다릅니다. 두 국가의 정치체제에 영향을 준 국민들의 여론도 달랐고, 실제 그리스는 갈팡질팡하다 포퓰리즘 정부마저 정책 변동 폭이 대단히 컸습니다. 아이슬란드가 증세를 했을 때 소득수준 별 실질 소득세나 자본세 등이 그리스와 크게 달랐습니다. 세금을 바라보면 대중의 인식도 달랐습니다. 어떠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고, 그러한 목적세적 특성을 가진 재정이 어떤 '선택과 집중'을 거쳤는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저자가 논하는 '보편주의'에도 반하는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공공지출의 경상GDP 대비 규모나 그 비율도 달랐으며 제도적 측면에서 차이는 사실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위기 이후 금융 부문을 어떻게 처리했고, 그 정책의 지속성이 언제까지 유지됐는지 또한 부채 총액의 해당 부문 비율을 고려할 때 아주 중요한 요인일 것입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거시정책인 통화정책을 논하지 않고 문제의 해결책을 복지로 환원시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통화 안정을 위해 어떻게 유동성을 확보했고 그게 어떠한 영향을 줬는지도 이야기했어야 합리적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략 끝에 "긴축이 실패한 정책이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연구에서 확인된 내용"이라며 인용 하나 없이 내린 결론도 아쉽습니다.이 결론을 이용해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대응을 비판하려는 시도는 이해할 수 있으나 앞서 지적한 이유들 때문에 근거가 미약해집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홍 부총리의 재정운용방식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아주 제한적으로 재정을 이용했고, 국채에 대한 과도한 리스크를 추정했습니다. 이는 2019년까지 세출에 대해 온건한 관점을 유지하고 있던 것과 대조되는 지점입니다. 마치 박근혜 정부 시절 40%라는 학술적 근거도 없는 재정건전성 지표를 맹신하고 있던 바보같은 행위를 바라보듯 적어내려간 서술방식은 홍 부총리에 동정표를 주고 싶게끔 합니다. 공적이전소득과 재정승수에 대해서 과연 기획재정부가 아무런 근거 없이 정책을 운용했을까요? 분명히 아닌데 책만 읽으면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조세재정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감세보단 세출 증가가 훨씬 더 GDP에 영향 미친다는 보고서가 있고 한국은행도 정부 지출 재정승수 효과는 2.3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국제통화기금 (IMF) 자료를 보더라도 감세 효과는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통계 분석자료가 있다." – 홍남기, 2019-11-05. 마지막은 비례대표제에 대한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자의 전문 분야가 아닌 관계로 말을 아끼려 합니다. 진보당과 리버럴당을 구분할 정도의 정성이었다면, 현실의 진보당이 어떤 계층을 위해 소리를 높이고 있는지도 조금 더 중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p.331의 ‹OECD 회원국의 GDP 대비 이전소득비율과 비례대표성› 그림의 미주에 오타가 있는데, 아무튼 여기서 인용한 Alesina et al.의 회귀분석에서는 GDP 대비 이전소득비율과 다른 변인도 같이 비교했고, 비례대표성의 경우에도 인과가 도출되기보단 다른 정치적 맥락 또한 주요한 이유가 된다는 사실, 정치제도가 가지는 내생성을 고려한다면*, 비례대표성만 비교한 것에서 결론을 의도하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소간 듭니다. *: "Political factors that influence U.S. exceptionalism run deeper than differences in electoral rules.", 결론에서 논문 저자가 주요 factor로 꼽은 "Racial fragmentation", "hostility to welfare", "a stronger connection between effort and earnings"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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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단부터는 9월 14일(현지시간) 미국 Pew Research Center의 서베이를 보고 적은 것인데요. 저자가 '핀란드 청년들의 고민' 파트에서 한국의 청년들과 핀란드 청년들은 고민하는 게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놀랍지 않느냐. 그 이유가 각 사회 배경에서 비롯한다. 이런 식의 논의에서 책을 출발시켰는데, 양립가능성을 얼마나 고려했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서베이 결과가 나와 아래와 같이 짧게 부연합니다. 핀란드 교육청 관계자가 이곳 청년들도 고민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죠. […] 핀란드 청년들은 '기후위기와 세계평화'를 고민한다는 거예요. […]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핀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손꼽히는 나라이기 때문이죠. – pp.23-24. "핀란드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의 반경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본" 것인데, 한국은 "자신의 문제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저자를 자문합니다. 그런데 COP26 총회를 앞두고 발표된 어제자 서베이 결과에서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먼저 기후변화가 생애 동안 개인의 삶에도 악영향을 주는 게 염려되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결과를 살펴보면 실로 충격적입니다. 한국은 겨우 11%만이 부정했습니다. 88%는 염려된다고 대답했죠. 기후변화의 영향을 잘 알고 있는 비율(= 긍정 - 부정)은, 조사대상국 중 최고치입니다. 저자가 강조한 "북유럽 청년"들의 국가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는 스웨덴은 무려 56%가 부정하고 겨우 44%만이 염려된다고 밝습니다. 한국(88-11=+77)과 스웨덴(44-56=-12)의 격차는 엄청납니다. 이러한 상관관계를 이루는 요인 중 하나는 정치성향인데요. 스웨덴의 우파는 겨우 27%만이 기후변화의 악영향이 염려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좌파도 57%로 낮은 편이에요. 한국은 각각 84%와 90%로 특이한 양상이죠. 하지만 이런 결과는 "(핀란드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을 인류의 보편적 삶으로까지 연장해서 보니" 같은 서술이 적절치 않다는 충분한 방증이 됩니다. * 한겨레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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