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은 몇 년 전에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 라는 소재에 이끌려 구매하여 읽었던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한 강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고, 정적인 분위기와 생각하게 하는 글귀들이 좋아서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얼마전에 '희랍어 시간'과는 너무나도 다른 '채식주의자'를 읽고, 주인공들의 강박적인 생각과 행동, 조금은 역동적인 분위기에 놀라긴 했지만.
열일곱살 겨울, 여자는 어떤 원인이나 전조 없이 말을 잃는다. 말을 잃고 살던 그녀의 입을 다시 움직이게 한 건 낯선 외국어였던 한 개의 불어 단어였다. 시간이 흘러, 이혼을 하고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고 다시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죽은 언어가 된 희랍어를 배우게 된다. 희랍어 강의를 들으러 가서 선천적인 이유로 점점 시력을 상실해 가는 희랍어 강사인 남자를 만나게 된다. 남자가 어두운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안경이 부서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여자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가슴 뛰는 로맨스를 상상하고 이 책을 읽으면 실망이 클 것이다. 서로 위로를 주고 받지만 그것이 보통 사람들이 부르는 '사랑'의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이 책은 스토리 위주로 흘러가지 않고, 여자와 남자의 감정, 생각, 감각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혹은 겪어봤던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위로를 걷낼 때 그 효과가 더 크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걷내는 위로와 응원은 왠지 진심인 것만 같다. 힘들어 봤던 사람은 힘든 사람의 마음을 더 잘 공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힘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것이다. '희랍어 시간'의 남자와 여자 또한 어떠한 말도, 빛도 필요없이 서로를 보듬는 것만으로 위안을 얻는다. 그 둘은 누구보다도 서로를 가장 잘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핍"을 통해 "공감"을 하는 두 사람이 짠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제대로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상투적으로 "네 마음 다 알아" 하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