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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성애자님의 서재
  • 위험사회 (반양장)
  • 울리히 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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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1-12
  • : 2,497

근대화라는 이름의 산업화는 인류에 풍요를 가져다줬다. 그 인류 중에는 지나친 풍요를 누리는 소수의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풍요의 근처에 가보지도 못한 다수의 사람들도 있다. 양 계급은 분배의 문제를 놓고 서로 갈등했다. 사회주의 같은 건 그 갈등의 산물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 갈등은 늘 먹고 사는 문제를 중심축으로 한다고 했고,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규정했다. 공정한 분배의 문제는 언제나 중요했다.


그런데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제 단순히 분배의 문제를 넘어 더 중요한 문제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바로 ‘안전’의 문제다. 근대화는 단지 풍요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위험’을 함께 불러왔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같은 핵발전소 사고, 가까이에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 또 갈수록 심해지는 미세먼지 문제 등, 인류가 편리하자고 만든 것들에서 파생한 것들이 오히려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이런 위험들 역시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다. 같은 위험 앞에서도 돈이나 권력을 지닌 나라나 사람들은 대처 능력이 강하므로 상대적으로 덜 피해입고, 가난한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거나 오히려 먹고 살기 위해 위험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후쿠시마 재난 지역을 정리하기 위해 한 사회의 불가촉천민인 노숙인들이 투입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소위 위험 시설들은 더 가난한 나라, 더 가난한 지역으로 자꾸만 이전된다. 하지만 돈과 권력으로 위험을 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전 지구적인 거대 재난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울리히 벡의 말처럼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니까.


사실 벡이 주장하듯이 '안전'이라는 가치가 정녕 '평등'이라는 가치를 몰아내고 핵심 의제로 자리잡을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은 생각 이상으로 근시안적인 동물이므로, 만약 '안전'이 '평등'을 대체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이미 손 쓰기 늦은 때이지 않을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윤을 위한 무분별한 발전을 멈추고 울리히 벡이 말하는 ‘성찰적 근대화’를 고민할 때가 되었다. 아니, 진작에 했어야 했다.그런데 그것을 위한 전 세계적 협의체를 만들 권력이 있는 이들은 자국의 이해에 얽매여 교토협정 같은 그나마 협의해 놓은 사안들도 쉽게 위반하고, 자본력이 있는 이들은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해 보험 같은 상품을 파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모든 문제를 늘 정치 문제로 환원하는 감이 있긴 하지만 역시 문제는 또 정치다. 벡의 제안처럼 기술 관료의 합리성에 대한 맹신을 깨뜨리고 전문가의 정보 독점을 넘어 시민들이 자신들이 직면하는 위험의 관리에 쉽게 접근하고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전 세계적 연대와 권력 독점의 해체를 지향하는 녹색당 같은 정당이 바로 그런 맥락에서 등장했으며, 녹색당의 성장은 그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성찰적 근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성장과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다른 체제들을 끊임없이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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