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1
자기성애자님의 서재
  •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 9,000원 (10%500)
  • 2006-10-20
  • : 11,293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과 긴밀히 결합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어머니의 몸속에서 밖으로 나오면서부터 겪게 되는 “분리 불안”을 갖고 있다. 그 불안은 낯선 누군가와의 하룻밤 섹스나 술 마시고 취하며 실컷 떠드는 행위 같은 것으로도 해소될 수 있지만 단지 그 순간에만 유효할 뿐이다. 불안을 지속적으로 극복 가능케 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인류의 영원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사랑 무능력자’들을 생산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키워드는 ‘소비’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상점에 가서 물건을 고르고 구매한다. 그러다 그 물건으로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느끼거나 질리게 되면 금방 버리고 다시 상점으로 가서 새 것을 산다. 그와 같은 삶의 방식에 익숙해진 이들에겐 사랑 역시 물건과 같다. 나의 욕구가 상대를 통해 온전히 실현되지 않을 때, 우리는 새로운 더 나은 대상이 있을 거라 믿으며 쉽게 다른 파트너를 찾아 나선다. 모든 것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교환 도구로 만드는 사회. 그런 사회에선 사람도, 그 사람들끼리 나누는 사랑도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다행히 사람은 사회 구조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나름의 자율성을 지닌다. 이 ‘사랑 불가능의 시대’에도 사랑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겠다. 그럼에도 우리 대다수는 쉽게 사랑에 실패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하므로,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에 골몰하기 때문이다. 또 “사랑은 ‘대상’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사랑의 대상이 나타나면 사랑은 당연히 잘 할 수 있다고 여겨,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사랑에 ‘빠진다’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 속에 ‘머물러 있다’는 상태를 혼동”하는 까닭에, 처음에 잠깐 존재하는 격렬한 감정을 진짜 사랑이라 간주하는 것 역시 사랑의 실패를 부추긴다.


이런 에리히 프롬의 지적을 뒤집어 보면 사랑의 실현을 위한 지침들을 엿볼 수 있다. 상대에 대한 “보호,책임, 존경, 지식”이라는 요소를 염두에 두면서, 사랑받으려 들기보다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키우고, 자신에게 완벽한 존재를 찾을 게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를 만나 완전한 사랑을 이루려 애쓰며, 사랑을 설렘이나 격정과 혼동하지 않으면서 인생 전반을 거쳐 꾸준히 실천해야할 어떤 가치로 여겨야할 것이다. 그 사랑, 보다 편히 실천하시라고 프롬은 방법까지 친절히 제시해 준다. “부단한 훈련, 정신 집중, 인내, 최고의 관심”, 그리고 “아는 것을 넘어 실천”하는 것. 그 모든 것을 일정 수준 이상 충족할 때, 우리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랑 능력자'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오랜만에 다시 접한 《사랑의 기술》은 거의 모든 문장이 아포리즘으로 다가왔다. 그 문장들은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보는데 도움이 되었다. 가령 나는 스스로가 긍정적 의미의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사실 그게 사랑 무능력자의 전형적 특성인 “이기심”에 가까웠다든가 하는. 물론 ‘개선의 여지없는 자기 성찰’이 특기인 나로서, 단지 실천 없는 공허한 앎의 양을 조금 더 늘린 것 뿐 아닌가 하는 냉소가 들기도 했지만. 나의 냉소와 별개로 특히 와 닿았던 부분은 형제애, 성애, 모성애, 신에 대한 사랑 등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랑에 대한 태도는 서로 긴밀하게 닿아 있으며, 사랑과 전반적인 삶의 태도 역시 분리될 수 없다는 프롬의 말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처럼 성애적 사랑에만 집중하는데다 전방위적으로 냉소적인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랑 무능력자일 수밖에 없겠다.


한편 개인에 초점을 두고 사랑을 이야기하던 프롬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답게 사회구조 변화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해답으로서 사랑에 진지하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은, 사랑이 고도로 개인주의적이고 말초적인 현상이 아닌 사회적인 현상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구조에 중요하고도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한국에서는 프롬이 문제 삼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천박하게 구현되어 있다. 더구나 오랜 권위주의 문화가 프롬이 “공서적 합일”이라고 칭하는, 다른 사람의 일부가 됨으로써 고립감과 분리감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미성숙한 사랑을 좇는 이들을 대량 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좋은 사회가 좋은 시민을 만든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떠올린다면, 결국 사람들 간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를 줄이고 오히려 북돋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보다 성숙한 형태의 사랑을 추구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겠다. 그리고 그와 같은 조건 아래에서 개개인이 가꾸는 성숙한 사랑은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해도 채울 수 없는, 결합을 갈망하는 사회의 빈 곳 구석구석을 기꺼이 메워나갈 것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