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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성애자님의 서재
  • 절반의 인민주권
  • E. E. 샤츠슈나이더
  • 13,500원 (10%750)
  • 2008-11-03
  • : 1,952

샤츠슈나이더는 현대의 민주주의가 ‘인민에 의한 통치’였던 고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와는 다른 대의민주주의임을 강조한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시민들을 대표하는 정치세력 간의 경쟁이며, 시민들은 그들 정치세력 중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상당수의 시민들이 그 과정에 참여하기를 포기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때의 시민들은 대체로 사회적 약자이다.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사회적 약자들이 투표를 거부하는 것은 투표참여에 대한 유인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곧 정치지도자와 정당들이 이슈 제기를 통해 갈등(투쟁)을 조직하고 사회화하는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쉽게 말해 정치세력들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1896년 이후 수십 년 간 북부에 근거를 둔 친자본 성향의 공화당이 집권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대선을 포기하는 대신 남부에서의 영향력을 견고히 유지하려던 민주당과 공화당 간에 암묵적인 담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담합으로 인해 굳어진 지역 기반의 보수 양당체제는 유권자들에게 있어 모든 정당 대안을 없애버렸다. 유권자들은 투표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처지가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었기에 선거 참여를 포기했고, “시민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고안된 체제”인 민주주의는 그 의미를 상실했다.


1900년대 초반의 미국은 지금의 한국을 연상시킨다. 미국에서는 민주당의 루즈벨트가 뉴딜 정책을 통해 사회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시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조치들을 취하면서 정치가 전국화 되었고, 민주주의는 의미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처럼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문제’, 소위 ‘민생’을 갈등의 우선순위로 만들면서 민주정치의 본질을 구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한국에서도 등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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