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열정이라는 작품이 오늘로 두번째이다. 2년전쯤 읽고 귀찮아서 리뷰를 안했는데 이번에 다시 읽고는 몇줄이라도 남기고 싶어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린다.
사실 이 작품의 내용은 지극히 통속적일 수 있다. 왜냐면 자신의 친구의 부인과의 불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말 드라마 <애인>이나 혹은 유행가 <잘못된 만남>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그저그런 내용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런 작품이 좋을까? 그건 이들 주인공들의 삶, 그중 특히 장군의 삶과 그의 인식이 드라마나 유행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장군과 그의 친구 콘라드는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장군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부인인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현실적이었지만 그의 부인인 크리스티나와 콘라드는 예술적이었다. 그는 사랑없이는 살 수 없는, 최소한 한 사람에게는 감정을 내보이고 싶은 갈망을 그의 어머니쪽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이었으나 본디 가난한 집안의 콘라드는 떨쳐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책임감에 힘겨워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그의 어머니를 만나 불행했듯이 그가 크리스티나를 만나 고독속에 칩거한건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대물림이었다. 사람이 바뀐다는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서 바뀜이란 이른바 '자기 정체성'을 의미하는 일이리라. 아마도 자기 정체성의 상실 내지 변화는 오직 현실세계에서는 완벽한 과거 기억상실로만 이루어 질 수 있으리라. 하리수가 성전환을 하더라도 겉만 변할 수 있듯 장군도 크리스티나도 콘라드도, 그리고 그의 어머니도 시간과 장소, 혹은 입는 옷과 사는 삶의 수준이 바뀌었을 뿐 근본적으로 그들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안타까운건 작가도 소설속 장군의 입을 빌어 말했듯이 이런 비극적인 만남이 지속적으로 재현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으로 순수영혼들에게만 해당사항이 있다 하겠다. 현실에 대입을 해보면 과연 이런 영혼의 소유자와 용기를 가진 이가 몇이나 될런지.
장군이나 콘라드의 비겁함과 자존심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둘 중 누구 하나라도 손을 내밀었던들 그녀는 그렇게 혼자 죽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 후 41년이 지난 지금까지 죽지도 못하고 그녀를 그리워하면서 그렇게 바보처럼 삶을 지속시키지도 않았으리라. 작가는 묻고 있다. 그녀에 대한 그들의 사랑 그리고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느냐고.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도망쳤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들이 41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과거를 껴안고 살아야 했느냐고. 과거나 미래에 사는 자는 결코 현재를 볼 수 없는 법이다. 물론 그에게 과거가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그 인생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고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과거에 연연하는건 누구나 다 알듯이 미련한 짓이다.
니체는 이런 인간들을 <역사적 인간>이라고 불렀다. 현재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삶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에만 집착하거나 미래에만 매달리는 몽유인들 말이다. 그들은 이 지상에서 불해한 삶을 숙명적으로 짊어질 수 밖에 없다고 니체는 단언한다. 따라서 니체는 망각이야 말로 행복의 첫번째 조건이라고 말한다. 잊어버렸어야 했다. 현실은 진실이 아니라는 말로 계속해온 진실찾기 게임을 당장 그만두었어야만 했다. 결국 그가 원한 진실은 그 진실의 창끝을 상대의 가슴에 쏘아 던져버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군의 고독을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말 장군과 콘라드 그리고 나는 남을 위하여 한번 뜨겁게 타오른적 없는 연탄재만도 못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