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함께했던 문장들

1

읽고싶은 책은 많지만 정작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재미없는 책들이 많다. 빌리지 않고 구매한 책이 재미가 없을 땐 통장 잔고를 도둑질당한 느낌이 들고, 선물 받아 읽기 시작한 책이 재미가 없을 땐 선물이라는 이유로 어쨌든 조금이라도 읽으려 노력하기 때문에 시간을 도둑질당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종종 북태기에 빠진다. 그래도 결국 다시 책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그래도 몇 권 뒤적거리다보면 꽤 근사한 문장을 하나쯤 건져내리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장을 발견하는 날에는 하루종일 기분이 좋다. 마음에 드는 노래를 출근길에 만났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다. 비록 복권 긁는 심정으로 그 하나의 문장을 기다리며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책들을 펼쳐야만 하지만, 그래도 책은 끝없이 나오고 있고 나도 책을 계속 읽기야 할테니 희망은 있는 것이다.



2




원자라는 새로운 개념을 따르면, 물질은 '포만'만이 아니라 원자가 움직이는 빈 공간인 '공허' 또한 구성한다.

- 하이젠베르크, <물리와 철학> 中


때때로 내가 만지고 있는 것들이 공허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하면 쓸데없이 아련해진다. 안그래도 단 한 번의 생을 살다가는 인간의 삶도 서글픈데, 만지는 것들마다 족족 공허라니 손에 닿는 감각들마저 아련해지고 서글퍼지기를 반복한다. 하필이면 지금 나오고 있는 노래도 Rainy Season이라는 곡이다. 후두두둑, 하고 비 내리는 소리가 맑은 피아노 선율 위로 떨어진다. 이렇게 명랑한 선율에 빗소리가 더해지면 그 곡은 기어코 슬퍼지고만다. 꼭 나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울한 사람이라 그 어떤 즐겁고 행복한 일에서도 슬픈 생각을 해내는 재주가 있다. 그 어떤 밝은 사람도 차분하게 만들 줄 안다. 그래도 사회 생활을 하며 나름의 잔뼈를 키우고 나름의 성격 개조를 하면서 어느 정도의 가면을 찾아 쓸 줄은 알게 되었다. 삶의 많은 시간들 또한 포만이 아닌 공허에 가깝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나 원자 안에서도 공허가 의미있듯 우리 삶에서도 공허가 마냥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다. 실은 그 공허조차 나의 일부인 법이다.



3



동물이나 꽃에 대한 사랑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中



사랑에 대해 가장 적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문장이 아닐까. 사랑의 기술 개정판이 나왔길래 집에 있는 책을 무심히 펴서 들여다보았다. 아무 포스트잇이나 집고 펼치니 저 문장이 튀어나온다. 문장과 함께 오래된 책에서 나는 책 냄새가 함께 튀어나온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들어선 헌책방에서 맡았던 바로 그 냄새다. 개정판이 너무 예뻐서 한 권 더 사둘까 싶었지만 약간의 허세가 발동한다. 개정판이 나오기 전부터 이 책을 알고 있었다는 묘한 자부심 같은 거다. 꼭 함께 아는 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안 지 얼마나 오래됐는지를 두고 은근한 뿌듯함을 느끼는 것과 유사한, 그야말로 쓸데없는 자부심이다. 


나는 그 사람이 내게 했던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당신은 어떤 때 사랑이 식는 것을 느끼냐고 내가 물었었다. 그 사람은 그런 일은 없었다고 손사레를 치다가 어느 순간 무언가 번쩍, 하고 생각난 듯 하더니만 내게 말했다. "날 대하는 모습이 변했다고 느낄 때." 나는 그 말이 신기했다. 자고로 사랑이 식는다면 이성으로서의 매력이 떨어지는 순간일텐데 자신을 대하는 모습이 변했다고 해서 그 매력이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인가 의아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날 이후 그에게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조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를 처음 만난 날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 둘 사이에 친밀하게 느껴지면서도 어색한 그 공기를 다시 떠올렸다. 소년같던 그의 모습을. 서로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그 소중한 시간들을. 그러면 그에 대한 익숙함은 사라지고, 그에 대한 적극적 관심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아마도 프롬이 말한 사랑의 기술은,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리라.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관심을 쏟아 붓는 그런 사랑 말이다.



4

요즘 퇴근을 하고 오면 멍을 때리며 하루를 보낸다. 좋아하는 음악을 연속재생 시켜놓고 멍을 때리거나 눕거나 늘어져있거나 읽지도 않을 책을 잠깐씩 펼쳐 보면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데 어떤 변화로 시작해야 재밌을까 고민만 줄곧 하고 있다. 운동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무언가 배우게 될 수도 있겠다. 의욕의 신이 나타나 내게 에너지드링크 한 사발을 쏟고 가 주기만을 기다리는 중인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퍽이나 하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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