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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 속 외딴 성
- 츠지무라 미즈키
- 14,850원 (10%↓820)
- 2018-08-31
- : 4,396
"평일 오전 열한 시라는 것이 이런 시간이라는 걸, 코코로는 학교를 쉬게 되고서 처음으로 알았다."
나도 그랬다. 평일 오전 열시에 시작해서 열한시 즈음 끝나는 주부 대상의 와이드 쇼. 그런 방송이 있구나 하는 걸 학교를 그만두고 처음 알게 됐다. 꽤 몰입한 채 방송을 보며--제작진은 십대 여자 아이를 타겟층으로 전혀 고려하지 않았겠지만--느긋하게 아침을 먹는다. 방송이 끝나감과 동시에 내 하루도 시작된다. 학교를 가지 않는 16살의 하루가.
이 책을 읽기에 나는 이미 너무 성인이 아닐까 하는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꼭 한번 읽어보고 싶었던 것은 나도 <거울 속 외딴 성>의 주인공 코코로처럼 학교에 가지 않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참 웃겨서, 나는 이전과 다름 없고 그저 학교만 가지 않게 되었을 뿐인데 나라는 인간이 어딘가 심각한 하자가 생긴 것처럼 굴었다. 덕분에 썩 행복하지 않은 기억도 더러 생겼다. 그런데 이 책도 학교에 안가는 아이의 이야기인데다가 압도적 1위로 서점 대상까지 받았다니. 대체 뭐라고 쓰여 있길래. '학교에 가지 않던 아이'로서 책을 집어들지 않고는 못배길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의 안자이 코코로. 입학한지 얼마 안되어 학교를 나가지 않은지 약 한달 째. 같은 반 아이들과의 불화가 그 원인이었다. '불화'라고는 하지만 사실 코코로가 잘못을 저질렀다거나 상대방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누군가를 괴롭히지 않고는 못견디는 아이의 레이더망에 걸렸을 뿐. 거짓말과 모함으로 코코로의 학교 생활은 순식간에 악몽으로 바뀌었다. 이제 코코로는 도저히 학교에 갈 수가 없다.
책의 작가 츠지무라 미즈키는 코코로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중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의 상황을 다양하게 설정해두었다. 각자의 상황은 그 나름대로의 심각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 누구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학교에 가지 않을만한 아이'처럼 묘사되지 않는다. 정말 커다란 문제가 있거나 대단한 결심을 하고 학교를 그만둔 게 아니다. 그저 남들도 가지고 있을 법한 문제 한두가지가 꼬여서, 어쩌다보니 학교를 안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경험자의 시각에서 말하자면 (나 또한 뭐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학교에 안갔던 게 아니다. 그저 다니던 학교가 마음에 안들었을 뿐.), 이러한 설정은 이 책이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현실성을 갖게 해주는 요소이다. 츠지무라 미즈키가 말한대로 이 책이 "고개 숙이고 있는 누군가가 얼굴을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쓰인 것이라면, 확실히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몰입할 수 있는 중요한 바탕을 갖추고 있다.
극중에서 코코로를 비롯한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않으면서 맞닥뜨리는 일들과 그로부터 느끼는 감정 또한 그렇다. 등장인물들의 경험과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입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면서도 개별 인물들의 특성이 잘 도드라져서 마치 실존하는 인물을 관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건 극중이 아닌 현실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책 속 이야기 자체에도 몰입감과 깊이감을 더해준다. '학교를 가지 않는' 설정이 만드는 특정한 상황에서의 심리 묘사도 진실되다. 츠지무라 미즈키도 등교거부의 경험이 있나 싶을 만큼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있다.
여느 때처럼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코코로의 방에 놓여진 거울이 어느날 갑자기 무지갯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거울을 통해 넘어간 세계에는 동화에서 봤을 법한 성이 있고, 코코로를 포함해 일곱 명의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이 모인다. 그들을 안내(?)해주는 늑대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여자아이--통칭 늑대님. 성에는 열쇠가 하나 숨겨져 있고 그 열쇠를 찾는 사람은 소원을 한 가지 이룰 수 있다. 단 시간 제한은 내년 3월, 학기가 끝나는 날까지. (일본은 3월에 학기가 끝나고 4월에 새학기가 시작된다) 대체 이 성은 무엇인지, 열쇠는 어디있는 것인지, 늑대님의 정체는 무엇인지, 함께 소집된 7명의 아이들은 어떤 관계인지, 등장인물들도 그 답을 모른다. 독자들과 공평한 위치에 놓인 셈.
이런 미스테리 (혹은 추리) 요소가 가미된 소설에서 가장 김빠지는 구조는 '힌트는 꽁꽁 숨겨둔 채 작가만 알고 있다가 결말에서 짜잔~ 몰랐지~ 하고 공개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언급이 없다가 사실은 이러이러한 단서가 있었답니다 라며 억지로 반전을 만들어내는 식이다. 책을 읽으면서 결말에서 모든게 밝혀지기 전까진 독자에게 주어진 단서도 없고, 따라서 스스로 추리를 해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건 제대로 된 미스터리 소설도 아니고, 읽고 나면 그저 배신감만 들 뿐이다.
<거울 속 외딴 성>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이 책은 위와 같은 장난을 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이들 7명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열쇠가 있을 곳은 어디인지, 권두에서부터 작가는 힌트를 심어두고, 늑대님의 입을 빌어 아이들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동시에 단서를 제공해준다. 덕분에 이야기를 따라가며 스스로 추리를 해보고 결말과 비교해보는 쾌감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내 추리가 맞았어요 여러분!!!) 엄밀히 말하자면 늑대님의 정체와 관련해서는 단서 자체를 숨겨둔 경향이 없지는 않은 것 같지만, 결말에서 늑대님의 정체가 밝혀지는 건 일종의 '보너스'와 비슷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뭐, 괜찮다. 그정도는 넘어가줄 수 있다.
이렇게 관대해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책이 정말 재미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심리묘사가 와닿고 힌트로 장난치지 않는다고 해도 재미가 없으면 결국 아무것도 안된다. 이때까지 이 책에 대해서 이런저런 점이 훌륭하다고 칭찬했지만, 결코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재미있게 쓰여졌다. 흥미진진하고, 등장인물과 함께 가슴 아파하고 기뻐하고,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몇 페이지 미리 넘겨보고 마는. 그런 재미를 모두 갖췄다. 그러니까 됐다. 학교를 착실히 다녔고 추리 소설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또 한 가지. 혹시나 표지와 주제를 보고 너무 청소년 소설스러울까봐 읽기를 망설이고 있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절대 유치하지 않으니까. 나는 청소년기에 온다 리쿠의 소설들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어느 정도 크고 나서는 그의 책들이 잘 읽히지 않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책들이--특히 청소년이 주인공인 작품은--조금 유치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용은 부실한데 너무 분위기만 그럴 듯하다는 인상도 받았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이다.) <거울 속 외딴 성>을 읽기 전에 내가 걱정했던 게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이건 청소년들의 이야기일 뿐, '청소년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책을 읽으면서 '16살의 나에게도 거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세계가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결말까지 다 읽고난 지금은 '어쩌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고 있는 것이, 꼭 작가가 이런 효과(?)를 노리고 엔딩을 쓴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최근 읽은 책 중 재미로는 손에 꼽을 수 있는 책이었고, 읽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썩 기분 좋지 않은 기억들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개인적으로 '치유'라는 말을 남용하는 걸 매우 싫어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그래서 작가에게 꽤 감사한 마음도 든다. 그 보답은 츠지무라 미즈키의 다른 작품들을 사서 보는 것으로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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