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을 제목으로 한 책 두 권을 낸 불문학자 유호식의 자서전 아닌 <자서전>, 자서전-자전적 소설 연구서 <자서전: 자신의 삶으로 이야기를 만들다>을 읽고 있다. 민음사에서 나온 전작 <자서전: 서양 고전에서 배우는 자기표현의 기술>에서 앙드레 지드, 나탈리 사로트, 샤토브리앙, 미셸 레리스 같은 문학가와 루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몽테뉴,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철학자들을 골고루 다뤘다면 서울대출판문화원에서 나온 후속작 <자서전: 자신의 삶으로 이야기를 만들다>는 대부분 '자전적 소설'로 분류될 만한 작품들(바르트의 <애도 일기>, 루소의 <외로운 산책가의 몽상을 제외하고)을 대상으로 작품론/장르론을 펼치고 있다. 필립 르죈의 <자서전의 규약>이 문학 이론서에다 번역서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잘 읽히지 않아서 유호식의 <자서전>으로 갈아탔다.
먼저 <자서전의 규약>을 짚고 넘어가 보려 한다. 자서전 장르를 문학의 한 갈래로서 본격적으로 다룬 거의 유일한 이론서, 비평서라 할 수 있는 필립 르죈의 <자서전의 규약>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장르로서 자서전을 성립시키는 '게임의 규칙'을 설명하는 1부 '규약', 루소-지드-사르트르 작품론이 수록된 2부 '자서전 읽기', 문학사의 관점에서 자서전을 논의하는 3부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자서전의 규약>이 해당 분야에서 교과서의 위상을 누리고 있다는 명성에 걸맞게 깔끔한 솜씨로 장르를 정의하고 있었다.
"한 실제 인물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재로 하여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인성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산문으로 쓰인 과거 회상형의 이야기"
실제 인물이 자기 삶을 회고적으로 쓴 이야기 정도로 간추릴 수 있겠다. 르죈이 밝힌 이 책의 탐구 목적은 "자서전 텍스트가 기능하도록 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그것을 읽는 독서 행위를 통하여 자서전 텍스트의 기능 작용을 살펴보는 것"이다. 쓱 훑어본 인상으로는 야우스의 수용 미학과 언어학/기호학(뱅베니스트가 자주 언급된다)을 접목해 '자서전 텍스트의 기능 작용'을 살펴본 것처럼 보였다. 르죈의 말을 빌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 번째 연구 「자서전의 규약Pacte autobiographique」에서 내가 보여주려고 한 것은, 자서전 장르가 그에 포함된 형식적 요소들보다는 그 텍스트에 대한 ‘읽기의 계약contrat de lecture’에 의해 정의되며, 따라서 역사적 시학은 읽기의 계약의 체계, 그리고 그 계약들의 통합적 기능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필립 르죈은 '규약' 파트에서 저자와 화자 그리고 주인공 간의 동일성 문제, 주인공의 인칭 문제 등을 논하며 형식적으로 자서전과 전기를 구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표준적인 형식을 정의하고 장르의 규칙을 규정할 수 있을 때, '자서전 연구'가 학술적으로 가능해지고 축적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척자로서 르죈의 성취는 칭찬받아 마땅해 보인다.
언어적 형태
a) 이야기 recit
b) 산문으로 되어 있을 것
2. 다루어진 주제: 한 개인의 삶, 인성의 역사
3. 작가의 상황: 저자(그 이름이 실제 인물을 지칭함)와 화자의 동일성
4. 화자의 상황
a)화자와 주인공의 동일성
b)이야기가 과거 회상형으로 씌었을 것
(17)
-회고록memoires(조건 2 부족)
-전기biographie(4a)
-한 개인의 삶을 그린 사소설roman personnel(3)
-자전적 시poeme autobiographique(1b)
-내면 일기journal intime(4b)
-자기 묘사 이야기 autoportrait 혹은 수필essai(1a와 4b)
자서전은 사실상 저자의 고유명이 제목에 해당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국역본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제목이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인 것처럼... 자서전은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이고, '저자-화자-주인공' 동일성이 지켜지고 있다는 '읽기의 계약' 하에 독자들은 네루다의 인생사를 읽는 것이다. 르죈은 "저자란 결국 출간된 일련의 여러 가지 텍스트에 책임을 지닌 동일한 인명"임을 강조한다. 르죈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시작하는 전기biography의 유구한 역사적 줄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기원으로 삼는 'Memoir' 장르의 역사와 '자서전Autobiography'를 구분 지으며 '근대의 장르'로서 자서전을 탐구하고 있다. 근대적 개인과 더불어 탄생한 이 특수한 사적인 글쓰기는 (일반적으로) 일대기적 서술을 통해 인생의 의미/목적을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걸 겨냥한다. 파편화된 일상을 열거하는 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서사적인 구조 속에서 인생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를 꿰어 보고자 하는 불가능한 야심, 끝(모든 걸 한눈에 볼 수 있다고 가정되는 위치)에 서서 처음부터 모든 과정을 (회고의 한계를 무릅쓰고) '다시' 보고 기록하겠다는 욕망...
자서전의 규약은 하나의 총체이다. 자신의 인생을 자기 이름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인생의 의미를 정해야만 한다. 또한 자신의 인생을 모두 감싸안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종합이 필요하며, 과거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의 자신을 설명해야만 한다. 스스로 작품 속에 개입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지드는 자서전이 갖는 이 모든 양상이 탐탁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기’라는 개념이 그 안에 제한과 인위성을 포함하는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내가 나 스스로를 인위적으로 모방하면서 나의 인생에 있어서 모조의 단일성을 일구어내겠는가?”, “이틀 후면 51세가 되는데도 아직도 나 자신을 모르다니! 무엇인가가 다 뒤섞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 자신이다. 사실 나는 스스로를 분석하려고 애쓰지도 않지만 말이다”, “나는 나의 느낌들을 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262)
저자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자서전을 쓴다면 독자는 타인의 자서전을 왜 읽는가. 역자 윤진은 "허구의 삶 속에 가능한 자기의 삶을 투사하는 간접 체험인가? 타인의 내면을 궁금해하는 은밀한 엿보기인가?" 운을 띄우며 결국 자서전을 읽는 독서 행위는 "자아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몸짓"이 아닐까 하는 화두를 던진다. 서사화된 인생 텍스트에 독서 행위를 통해 개입함으로써 '자아 정체성 회복'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 이뤄질 수 있는지 규명하려면 지면이 꽤 많이 요구될 텐데... 차차 고민해 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