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휴休. 많이 좋아하는 한자입니다. 사람이 나무에 가만히 기대어 쉬는 모양, 그 시간.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고단함을 옆에 눕히고 깊은 호흡을 하며 쉴 수도 있을 듯합니다.

“니카라과에는 그녀의 큰 숲이 있다. 그곳에서 그녀는 홀로 백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있다.”
숫자가 가장 중요한 건 아니지만, 백만 그루... 가늠이 안 된다. 씨앗 뿌리기부터 시작했다고 하시는데, 묘목 키우는 일도 옮겨 심는 일도 공장 생산품이 아니라, 변수가 크다. 그 일의 ‘반복’이 백만이라는 숫자보다 더 큰 기적 같다.
누군가 내게 종교를 물으면 한 때는 ‘나무교’라고 했던 진심이 무색하게 나무숲과 멀어지기만 하는 내 삶이 다시 불만스럽게 낯설어진다. 곧 떠날 지도 모르는 사람이 열심히 나무를 남기는 이야기, 책으로만 말고 그 숲에 가보고 싶은 기분이 불쑥거린다.
“나무마다 사투리가 다 다른 것 알아요?”
저자는 과학자다. 그래서 불편하게 아득한 신비주의적 사고나 화법을 구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절개하고 분석하는 과학적 방법론의 한계와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오래 전 자주 만난 다정하고 아름다운 생태주의자 친구들을 생각나게 한다.
“오래 살아온 한 생명과 그 앞에 선 또 하나의 생명”으로서, 상실과 실패를 경험한 짧지 않게 산 사람으로서, 저자가 독백처럼 전하는 문장들이 새로 뻗은 부드러운 나뭇가지 같다. 저자보다 덜 살아본 독자로서, 알게 되는 지식마다 이젠 부담과 책임으로 느껴질 뿐 즐겁지 않은 나의 요즘을 잠시 관찰해본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순간, 무엇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알려주는 과학을 전공하고 내내 배우며 살았지만, 요즘엔 어린이들까지 첨단과학기술 상품들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살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대답은 부재하거나 부족하다.
지식 정보는 넘쳐나는데, 욕망을 절제하는 법도 약한 생명을 연민하는 태도도, 미래에 태어날 존재들에 대한 상상력도 부재하거나 부족하다. 지혜를 배우지 못한 기술자들의 세계 같다고 느낄 때도 있다. 생사의 순간에도 멈춰 서지 않는 어리석은 속도전의 세상 같기도 하다.
한 그루가 다른 한 그루와 같지 않다는 것을 오래 바라보아야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도 그런 속도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가며 살아야 살육 대신 평화가 틈입할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자발적 디스토피아 구축 속도에 멀미가 난다.
“인간은 나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 구원받아야 할 존재는 나무일까, 인간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