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가 점점 더 많아진다. 청소년 문학이 따로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대한 보상 같은 궁금증이기도 했고, 훨씬 직설적인 표현 방식이 좋기도 했다. 지금은 숨 가쁘게 빨라진 변화가 넓힌 세대 차이에다가, 소셜미디어 사용으로 더 멀어진 다른 일상과 고민을, 문학을 통해서라도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우면서도 웃음이 나는 표지다. 그래도 표제작부터 찾지 않고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었다. 달라진 조건들은 많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꽤 외롭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동물 친구들과 동년배 친구들, 혹은 상상의 친구들이 채워준다. 욕망에 사로잡힌 못난 어른들의 세상에서 서로를 돌보는 이들 모두가 안타깝도록 연약하고 소중하다.
“500년 넘게 진짜 지루했는데 이제야 좀 재밌어 지려고 한다.”
표제작은 아주 흥미로웠고 너무 슬펐다. 속상해서 울고 싶기도 했다. 차별금지법도 혐오방지법도 없는 사회라서, 저지선도 교육도 부재한 현실이라서, 10대는 혐오를 놀이로 삼고 일상 언어로 사용하는 끔찍한 상황에서, 경박한 사고와 태도로 근거 없는 혐오와 단죄를 벌이는 풍경을 문학으로도 만나는 순간이 아팠다.
인간다움의 오류들을 정직한 문장으로 기록한 고발장 같다.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 보호 받지 못하는 어린이, 문제의 원인을 늘 외부에서 찾는 습관, 과학도 논리도 없이 가장자리에 있(다고 멋대로 규정한)는 이들에게로 당연한 듯 향하는 책임 전가,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고 혐오를 놀이처럼 여기는 아이들. 현실은 더 심각할 거란 경고다.
“적극적이란 단어가 왜 공정함과 연결되는 걸까, 소극적이면 비겁한 걸까.”
산업 기술을 개발하고 활용을 선점하지 못하면 반드시 굶어죽고 말거란 두려움은 정확한 진단일까. 그래서 핵발전소도 더 짓고, 엄청난 열공해를 유발할 데이터센터도 최대로 짓고, 빙하가 녹는 것도 기회라며 북극항로 개척을 기뻐하고, 그렇게만 하면 한국 사회의 미래는 불행으로부터 더 유예 되는 걸까.
우리 집 십대 아이들을 생각하면 두렵다. 기성세대의 뜻도 의지도 상상력도 치졸해서 부끄럽다. 그 수준이 진심이자 최선일 거라 생각하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사람을 살리고 살게 하는 일에는 다른 고민들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양육/교육과 양육/교육 환경과 양육/교육종사자들의 노동조건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시작되어야 한다. 늦었지만 하루라도 더 늦지 않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