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처럼 커서 곰개, 고마, 가마, 가문, 거문, 이런 말은 다 곰이라는 뜻인데, 모두 크다는 소리야.”
배명훈 작가의 오랜 팬으로서 제목이 낯설고 짐작이 어려웠다. 익숙한 SF 장르도 익숙한 판타지 소재와 형식도 아니다. 매번 그렇듯 학위논문보다 자료조사를 더 많이 하고 난 창작물,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1부를 읽으면서는 집중과 노력이 꽤 필요했다. 사극에 별로 익숙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처음 만나는 단어들이 적지 않았다. 사전 중심의 빠른 게임 같은 전개가 아닌 차분한 묘사와 서술이 치밀하게 얽힌 이야기다.
“그저 살아 있기만 해도 반역이 되는 사람도 있다. 잠깐 숨통이 트이기만 해도, 발을 뻗고 자는 날이 아주 조금 길어지기만 해도.”
끊임없는, 피할 수도 없는 권력의 위협 속에서, 생존을 위해 제대로 된 삶을 거의 다 포기해야하는 깊은 함정 같은 상황이 실감나게 표현된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크다. 이렇게 오래 억눌리면 무엇을 계기로 각성할지 기대가 커진다.
자료와 지식 정보가 탄탄한 작가는, 가볍고 빠른 속주 대신 마치 그물 밑을 기어서 빠져나가는 고단함을 느낄 만큼 정교하면서도 무리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독자를 현실감 있는 이야기 속으로 더욱 깊이 끌어들인다.
“1021년. 이제는 기억조차 전해지지 않는 고대 천문학의 가장 중요한 숙제. 그보다 짧은 어떤 주기로도 대비할 수 없는, 번거로운 주기의 숨겨진 의미.”
제목의 기병과 마법사가 어떤 존재들인지 궁금했다. 순전한 창작물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존재한 이들처럼 느껴지는 지점이 놀랍다. 기록이 없던 시절을 작가가 발굴해서 시각 정보로 전해주는 듯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상상 불안과 위협에 스스로를 괴롭히다, 망상과 모함이 날개를 펼쳐 제가 아닌 다른 모든 일들을 해치는 권력자가 짜놓은 모진 그물 같은 세상에서, 약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그리 다양하지는 않다.
다만, 연결되고 연대한 개인들은 유무형의 힘들을 독점한 소수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만은 현실에서도 판타지에서도 같은 희망이다. 겨우 한 표만 행사할 수 있는 주권자이나 그 결과로 현재와 미래 모두가 바뀔 수 있는 것처럼.
웅숭깊은 이야기가 품은 의미와 작가가 전하는 개념을 더 선명하게 독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어떤 뜻인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일희일비를 잠시 잊고 오지 않은 행복을 상상해보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역시 배명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