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도 절로 마르며 지난해를 마감한, 자줏빛 천일홍 꽃송이를 옆에 두고 천천히 읽다보니, 청보랏빛 히아신스 두 송이가 만개했다. 책과 함께 사진에 담은 몇 초 동안 정신이 비틀거릴 만큼 향이 진하다.


아름다운 책을 만나 알아가는 동안 내가 속한 인간 사회는 소란과 요란을 거듭하며 결정적이고 전환적인 사건들을 차례로 맞았지만, 꽃향기에 잔뜩 취해서인지, 꽃이 피는 사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아니었던 듯싶기도 하다.
약속을 지키기보다 어기는 경우가 더 많고, 아름답기보다 난감하도록 추한 결과도 많고, 인간 사회의 풍경은 그런데, ‘꽃이 핀다’는 건 아주 다르다. 조건이 딱 맞으면 알람이 울리듯 피어나는데 아름답지 않은 적이 없다.
SUMMER SNOWFLAKE
RESEMBLES A GIANT
SNOWDROP,
FLOWERING IN SPRING -
NEVER SUMMER.
서머스노플레이크는
자이언트스노드롭을 닮았지,
봄에만 피어나고 -
여름엔 절대 피지 않아.
애나 앳킨스, <레우코줌 바리움>
Anna Atkins, Leucojam Varium, 1854

화구를 찾아내어 뭐라도 그리고 싶게 만드는, 위험하고 고혹적인 그림들을 하나하나 한참 바라본다. 예술가들이 매혹된 이야기들, 사랑에 빠진 채 작업한 이야기들, 다양한 종류의 꽃에 끌려나오는 내 기억 속 이야기들.
특히 이번 산불에 타버렸다는, 종가의 목련과 모란과 작약과 사과나무를 애도하며, 아직 살펴보러 가지 않은 나를 채근하며, 자연의 사계절도 예술작품 속 사계절도 내 사계절도 담긴, 그림 속 꽃들 속의 기억 속 꽃들을 가만 본다.


때론 나보다 오래 살 것이라 부러워했던 꽃나무들은 분명 경이롭게 자력 재생할 것이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사라질 일 없는 그 꽃들을 - 피워낸 생명력을 - 믿고 나는 곧 부모님 본가와 친지들을 뵈러 갈 것이다.
그 길에는 이 책에서 만난 화가의 꽃들이, 다채로운 빛과, 경험과 상상으로 재구성한 향기로 동행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더 많은 꽃들을 알아보고 반가워하게 될 새 봄과 여름을 설레며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