왝왝왝...이 울고 있는 소리라고 해서, 읽기도 전에 그 핑계로 주룩주룩 울고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가치가 없다’라는 말이었다.”
중요한 건 아무 것도 잊지 않는다고 자신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점차 예전에 쓴 글조차 낯설고, 과거의 순간들이 담긴 사진들이 새롭기만 한 시간이 찾아왔다. 진심을 부정당해도 어쩔 수 없는 건가 싶게 망각이 쉬워졌다. 존재와 장소를 선언한 제목이 잊힌 존재의 항변 같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은 힘을 잃고 만다. 기억은 힘이 세고, 기억을 통해서 문명은 학습한다. 어른들이 결정하는 세계에서, 어른들이 정한 방식으로 얼마간의 기간 동안 애도하는 것은 어떤 상처를 남길까.
“이름을 붙이고 눈에 보이는 동안 자꾸자꾸 불러 보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게 되거든.”
어른들의 할 일과 책임을 들먹이며 어른인 체 했던 순간들이 부끄러워 혼자 읽는 시간에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참사로 희생되는 이들이 비율적으로 연령적, 사회적, 물리적 약자들이 더 많다는 점을 생각하니, 청소년 문학의 존재가, 이 작품이 더 귀하다.
“적어도 나만큼은 계시라는 단어를 쉽게 쓰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이 언제였더라.”
비장미가 지나쳐서 “놀다 죽었다”란 프레임이 짜이면, 참사의 희생자들임에도 욕을 먹는 한국 사회에서, 애도란 무엇이고 애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반복되는 비극이 기적처럼 어느 순간부터 멈출 리가 없으니, 이제라도 언제라도 다시 배워야 한다.
죽임 당한 이들도 남은 이들도 외롭지 않게, “자격 운운”하며 욕먹지 않게, 아픔이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되지 않게, 어둠 속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사라지지 않게, 도울 일들은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아무리 부정해도, 그 누구도 영원히 어떤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사회를 만들고 변화시킬 주체들도 마찬가지다. 기성세대가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과거의 망령들이 끝없이 부활하는 듯한 시절에, 빛나는 연대로 이를 물리칠 존재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매주 현실의 광장에서 목격한다.
어른들이 덮고 살자고 한 상처가 썩어 고인 하수구 물속을, 두려워하지 않고 걸어 들어간 친구들의 존재가 작품 속에서도 빛난다. 수인성 질병이 두려워 한 발도 못 담글 어른 독자라서 부끄럽다. 참사의 목격자가 아니라, 생존자이가 유가족인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던 시간이 감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