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났다는 사실보다 끝났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의 삶. 폐허 속에서 그들은 사랑하고, 굶주리고,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하루를 이어간다. 현재의 풍경 위로 과거의 기억이 겹쳐지며 순간순간 묘한 혼란을 준다. 그럼에도 전쟁터에서 도망쳐 나온 한 남자의 위태로운 발걸음을 따라가게 된다. 그의 이름은 한스 슈니츨러.
저 멀리 어떤 형체가 그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어떤 살아 있는 얼굴보다 더 사람 같았던 먼지 쌓인 석조 천사상이었다. 한스는 기묘한 희열을 느낀다. 전쟁터에서 그는 사람을 서로 죽여야 할 대상으로만 보았을 것이다. 혹은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죽은 표정’으로만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천사상은 그를 그저 가만히 응시해 준다. 인간의 흔적을 간직한 그 미소에서, 그는 너무 오랜만에 누군가의 따스한 시선을 느낀 걸까.
하지만 입김을 불어 먼지를 털어내자, 희열은 금세 사라진다. 서서히 드러나는 번들거리는 니스칠과 조악한 도금의 흔적. 전쟁이 끝난 뒤에도 결국 다시 돌아가야 할 세계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는 어쩌면 그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도입부가 참 좋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정신없이 잔해뿐인 거리를 떠돌던 한스는 어느 순간 폭격으로 무너진 자기 집 앞에 서 있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p. 29) 그런데 돌아온 곳엔 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도입부가 좋건 안 좋건,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가 싶다. 이 폐허 속에서 무슨...
탈영병이기 전에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학교가 전부였던 학생이기도 했다는 사실과 마주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기 위해 수없이 이름을 바꿔야 했던 한스. 다른 이의 신분 뒤로 자신의 진짜 얼굴을 숨긴 채 돌아온 그를 맞이한 건, 그가 버려야 했던 이름만큼이나 처참하게 지워진 집의 흔적이었다. 그는 과연 ‘한스’로 돌아온 것일까, 아니면 누군지도 모를 타인의 그림자로 돌아온 것일까.
소설 속에서 과거 전쟁터로 나가기 전, 한스가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가 유독 마음을 힘들게 했다. 가장 가슴 아픈 건 죽음의 공포 그 자체보다, 서로가 서로의 두려움과 슬픔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애쓴다고 달라질 수 없고, 감춘다고 감춰지지 않는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한단 말인가. 왜 그런 때가 있지 않나. 지금 가장 두렵고 막막한 건 분명 나 자신인데, 그런 나를 바라보는 가족이 더 가슴 아파할까 봐 오히려 그 마음이 더 견디기 힘든 순간들.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 속 이야기인데도, 참 현실적인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지금의 한스에게서는 가족이나 지난 삶을 향한 그리움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랬었지.’ 정도에서 머문다. 그리움이나 슬픔도 마음의 에너지가 남아 있어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듯, 한스는 영혼까지 싹 다 타버린 걸까.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이 너무 깊으면 본능적으로 ‘진짜 나로서 느꼈던 기억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 가둬버리는 것처럼.
이 소설은 ‘전쟁 이후’의 삶을 비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라는 그 선언만으로 이들의 비극을 단정 짓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본래의 삶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면, 포성이 멈췄어도 그것은 전쟁 중인 상황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도망칠 곳도, 가짜 이름으로 숨어들 곳도 없다.
유령 같은 존재가 된 한스는, 자신처럼 겨우 숨만 쉬며 살아가는 한 여성을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레기나.
서로 상처를 들추지 않으려는 듯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그녀가 머무는 작은 방 한구석에 “영영 머물러도 되냐” 묻는 한스와 그것을 담담히 수락하는 레기나의 기묘한 동거. 더는 누구의 삶도 감당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기에 가능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폐허 속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다정함이란, 이런 걸까.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지?”
“드디어 나한테 그런 의논을 하니까 기뻐.” (p. 90)
원초적인 생존 본능만 남은 세계에서, 다시 인간적인 감정과 관계가 생겨나는 순간. 누군가와 다시 ‘생활’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순간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레기나의 대답이 유독 인상 깊었다. 전쟁이 인간의 감정 자체를 어떻게 소진시키는지를 오래 바라본 소설이었기에, 한스와 레기나의 만남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온갖 매캐한 악취로 코를 찔렀다. 제대로 된 건물 하나 없이 폐허가 된 도시, 고여 있는 물은 피부에 닿기만 해도 병에 걸릴 것처럼 썩어 있고,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들로 가득 찬 공간에는 숨 막히도록 짙은 죽음의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저자는 이 모든 상황을 번드르르한 것으로 덮거나 어설프게 칠하는 것을 질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진짜 이름을 버리고 타인의 유령이 되어야 했던 배급제 시절의 절박함과 저마다의 방식으로 비루하게 혹은 처절하게 버텨내는 다양한 군상들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된다.
“도무지 슬퍼할 수조차 없어. 우습지 않아?” (p. 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