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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님의 서재
  • 물처럼 단단하게
  • 옌롄커
  • 16,650원 (10%920)
  • 2013-02-15
  • : 290
얼마 전, 위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인생>으로 잘 알려진 장예모 감독의 <원 세컨드>를 봤다. 영화의 무대는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사막. 척박한 땅에서 고된 노동을 견디는 이들에게 명절보다 설레는 날은 영화 상영일이다. 모래바람을 뚫고 오토바이에 실려 온 필름 통이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빛의 세계가 열리던 시절, 영화는 두 달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귀한 축제였다.

바글바글 모여든 사람들의 땀 냄새 섞인 공기 속에서도 스크린의 불빛만을 기다리던 간절한 눈빛들. 누구랄 것도 없이 달려든 마을 사람들이 흙먼지에 오염된 필름을 귀한 보물인 양 정성스레 닦아내는 모습은, 지극한 정성을 넘어 엄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특히 반동으로 몰려 노동 캠프에 갇힌 주인공이 선전 영화 속 찰나의 순간, 단 ‘1초’뿐인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그 어떤 거창한 혁명의 구호보다 인간적이고 뜨거웠다.

옌롄커의 소설 <물처럼 단단하게>는 그 숭고한 ‘인간애’의 자리에 ‘욕망’을 밀어 넣는다. 똑같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누군가는 단 1초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파멸을 무릅쓰고 사막을 건넜다면,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본능을 정당화하는 훨씬 편리한 명분으로 혁명을 앞세운다. 작가는 그 거창한 명분 뒤에 숨은 인간의 민낯을 아주 작정하고 들춰낸다.

이번에 처음 읽게 된 옌롄커의 작품. 제법 두툼하다. 독서대에 책을 고정하는데, 표지에 들어간 옌롄커의 얼굴이 읽는 내내 강제 오픈되는 바람에 그 다소곳하면서도 사색적인 시선 처리를 실시간으로 감당하며 한 장씩 넘겨 내려갔다.

주인공 가오아이쥔은 자신을 숭고한 혁명가의 자식이라 정의하며 스물두 살에 입대한다. 원한다면 군 복무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지만 ‘고향에서 진짜 혁명을 일으키겠다’라고 밝히며 4년 만에 제대한다. 그런데 그의 속내를 까 보면 참 일차적이다. 1년 8개월 동안 여자 구경도 못 했다는 둥 본능적인 허기를 운운하는 모습을 보니, 이 남자의 원대한 꿈은 숭고한 이념보다 억눌린 결핍과 욕망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진실해야 합니다. (p. 17)

가오아이쥔의 이 천연덕스러운 자문자답을 마주했을 때만 해도 ‘그래, 인간이라면 그래야 마땅하지’라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으나, 뒤이어 나오는 고백들이 가관이다. 권력의 핵심인 지부 서기의 딸이라서 아내를 선택했다는 말부터, 풍채가 남다른 아내를 묘사하며 굳이 마오쩌둥을 거론하는 뻔뻔한 솔직함까지.

그의 들끓는 열정은 고향에 오자마자 엉뚱한 곳에서 폭발한다. 샤훙메이라는 여자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버린 것! 사실 그녀는 초면이 아니었다. 우연히 철길에서 마주쳤을 때, 가오아이쥔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보란 듯이 맨발을 드러내며 발가락 플러팅(?)으로 묘한 살냄새를 풍겼던 구면의 여성이었던 것. 이 지독한 첫 만남의 잔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재회했으니, 불이 붙는 건 시간문제였다.


시대의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시간, 가오아이쥔은 옌롄커가 곳곳에 심어둔 불온함 속에서 자기 욕망을 부지런하게 몰아붙인다. 단단하게 굳은 대의를 비틀고 예리한 칼날로 현실을 쓱 그어버리는 파격. 멈추지 않는 이야기 그 틈새로 튀어나오는 상징들을 알아채는 재미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은 울분 속에서, 살만 루슈디의 책들이 남기곤 하던 분노와 희열이 뒤섞인 특유의 잔상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니 왜, 가진 게 쥐뿔도 없어 판이라도 뒤집어보려 근거 없는 패기 하나로 거친 역사에 몸을 던지는 무모함을 볼 때 말이다. 집안 배경도 출셋길도 막막한 처지에서, 혁명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쫓아 가족마저 뒷전으로 미뤄두고 밖으로 나도는 매정한 뒷모습. 거기서 느껴지는 욕조차 아까운 한심함, 그러다 어느 순간엔 기어코 애처로워지고 마는 그 복잡한 심경. 휴, 인간의 민낯에 낄낄거리다가도 문득 서글퍼지는 건, 왜인지 모를 일이다.

이따금 겸연쩍을 때면, (책을 뚫고 전달되는 따가운 눈초리를 의식이라도 한 듯) “제 말을 끊지 마십시오.”라며 세상 점잖은 톤으로 엄포를 놓는 그 도둑이 제 발 저린 듯한 방어기제를 구경하다 보면 어이없는 실소가 삐져나온다. 만약 그가 결핍 하나 없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이토록 처절하게 혁명을 운운했을까, 하는 물음에 이미 답이 읽혀버린 탓일까. 그건 그렇고 혁명이란 단어는 수백 번 본 것 같은데... 아니, 아이쥔! 진짜 혁명이라는 게 있긴 한 겁니까? ㅋㅋㅋ


마오쩌둥의 어록을 불쑥불쑥 소환시키는 이 기묘한 서사 끝에, 나는 가오아이쥔이 온갖 생각을 쥐어짜고 요란하게 쌓아 올린 이야기 아래에서 혁명은 거창했고, 인간은 그보다 더 적나라했음을 확인했다. 옌롄커의 책들에 ‘금서’라는 딱지가 떨어지지 않는 이유도, 결국은 그가 끝내 시선을 거두지 않는 지점 때문일 것이다.

꽉 쥐고 있던 손가락을 쫙 펴는 것처럼, 이런 불편하고 노골적인 세계를 자유롭게 헤집으며 헛웃음 한 번 지어보는 것. 고상하진 않아도, 금기를 넘나드는 이야기만이 줄 수 있는 그런 솔직함을 느끼는 동안 문득 권력의 검열 아래 입을 틀어막힌 이야기 중에 얼마나 많은 수작이 묻혀버렸고, 묻히고 있는가를 생각하니, 새삼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달빛 아래, 복잡한 심사를 띄워 보내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가오아이쥔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자신의 날뛰는 마음을 노래 가사가 이토록 고요하게 가라앉혀줄 줄은 몰랐다던 그의 나직한 고백. 나 역시 이 소설의 어느 갈피가 내 마음을 붙들 거라 예상치 못했듯이. 투박한 노래 한 줄에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의 마음. 왜인지 이 장면이 한쪽 가슴을 뜨겁게 데운다. 묘하게도 우리가 책을 읽으며 얻는 감정과도 맞닿아 있어서일 테지. 어지럽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뒤늦은 평온.

그리고 나는 이 비루한 역사의 굴레 속에서, 작가가 끝내 손에서 놓지 못한 볼펜의 무게를 가만히 가늠해 볼 뿐이다.

“저는 죄상을 폭로해줄 투박한 심대의 볼펜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p.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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