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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님의 서재
  • 내 이름은 빨강 2
  • 오르한 파묵
  • 11,700원 (10%650)
  • 2019-10-28
  • : 13,852
한 세밀화가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누가, 왜 그랬는지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16세기 오스만 제국, 궁정에서는 서양식 원근법을 몰래 도입하려는 책이 제작되고 있었다. 전통과 새로운 시선 사이에서 흔들리며, 세밀화가들의 내면도 조금씩 드러난다. 처음에는 범인이 누구인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보다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이번 리뷰에는 살인사건의 전개보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과 선택을 보여주는 두 여성, 세큐레와 에스테르, 그리고 마음에 남는 몇 장면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 한다.

일단 세큐레. 1권에서 등장한 남자 주인공 카라(검정)가 사랑하는 여자. 그녀는 내 마음을 가장 널뛰게 한 인물이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채, 사회적으로도 애매한 위치에서 아이 둘을 키우고, 시동생 하산과도 얽혀 있다. 그렇다고 카라에 대한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그냥 변덕스러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럴까 싶고. 그런데 계속 따라가다 보니, 그게 그렇게 단순하게 잘라 말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과 제도의 경계 속에서 선택해야 하는 현실, 거기에 카라의 사랑까지 얽히니, 감정 하나로 정리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해가 될 때도 있지만, 어느 순간은 전혀 못 따라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티고 있던 감정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마다 자신도 모르게 둘째 아들의 따귀를 ‘찰싹’ 때리는 장면이 그랬다. 삶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결국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감정이 튀어버리는 것이다. 단순히 나쁜 행동이라고 잘라 말하기에는, 그 안에 그녀가 느끼는 상태가 고스란히 보이는 느낌이었다. 사람이 무너지는 순간을 옆에서 보고 있는 기분.

나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 책을 통해 여러 감정을 접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좀 막혔다. 현실에서도 흔히 목격되는 패턴 아닌가. 아이들이 감정의 출구처럼 소비되는 장면을 보면서, 내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인간의 모순을, 부모와 어린 자식의 관계 속에서 드러내니까 불편하게 받아들여졌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이 소설이 그려내는 전통과 새로운 시선, 서양과 동양, 예술과 삶의 경계가 흔들리는 틈에서, 세큐레는 당시 여성으로서 얼마나 불안정한 선택의 기로 위에 위태롭게 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약간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를 건드리는 여성도 있었다. 유대인 상인 에스테르.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며, 때로는 속물적이기까지 하지만, 감정에 휩쓸리는 사람은 아니라서 오히려 덜 답답했다. 그녀는 카라와 세큐레 사이에서 오가는 편지를 배달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소식을 전하고 관계를 이어 붙인다. 감정적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관계와 정보에는 깊숙이 개입하는 인물이다. 늘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느낌.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시선이 묘하게 불편하지만, 희한하게 이해가 갔다. 따뜻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차갑다고도 할 수 없는 사람. 정을 쌓기보다는, 필요할 때 닿았다가 떨어지는 관계처럼 존재한다. 딱 그 순간만 같은 편에 서주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사실 가까이 두고 싶은 타입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숨이 트였다.

이 소설의 사건들, 세밀화가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단순히 범인을 찾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중에서도 같은 이야기와 소재를 서로 다른 화풍으로 그린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고, 어느 세밀화가의 손길인지 맞혀보는 장면은 굉장히 흥미롭고, 몰입해서 읽은 장면이었다. 이슬람 회화가 서명도 없이 한 작품을 여러 명의 화가가 나눠 그리지만, 그래도 각자의 특징이 자연스레 드러난다는 점을 발견하는 재미 덕분이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생각지도 못한 아주 작은 디테일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어릴 적 나는 그림을 본다는 게 결국 ‘얼마나 실제처럼 그렸는가’를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건 서양의 시선에 너무 기울어진 생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 회화가 원근을 만들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붙잡으려 했다면, 이슬람 회화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더 중요한 질서와 의미를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세밀화가들은 자신의 개성을 지우고 전통을 따르며, 독창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자연스럽게 여겼다. 자신을 한 걸음 물러놓고, 모든 것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몸짓처럼 느껴졌다.

어떤 세밀화가가 말 그림을 설명하며,
“세밀화가는 자신의 분노와 질주를 그리지 않는다네. 가장 완벽한 말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하면서, 세상의 풍성함과 그것을 창조한 이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의 빛깔들을 보여줄 뿐이지”라고 했다.

세밀화가는 자신의 시선보다 오래된 방식을 존중하며 작품 속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세큐레와 에스테르는 각자의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하며 삶을 이어갔다. 서로 다른 길이었지만, 자아를 지워가며 살아야 했던 그들의 결은 어딘가 닮아 보였다. 자신을 지울수록 그 삶이 견뎌내야 했던 괴로움만은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왔기에,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려낸 인생사는 내 마음 한편을 왠지 모르게 서글프게 했다.

이슬람 회화와 서양 회화, 두 세계의 충돌뿐 아니라 결국 사람을 그리고, 삶을 다룬 소설이기에 더 집중하며 읽을 수 있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경한 계절의 풍경을 바라보듯 느껴보기도 했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느껴보기 위해 소설을 읽는 거지 싶다. 과연 범인이 누구일까 따라가는 긴장감 속에서도 유독 기억에 오래도록 남은 장면이 하나 있다. 2권 초반에 천국과 지옥 사이 어딘가에 놓인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는데, 나는 이미 생을 마감한 자의 독백 안에서 여러 감정을 헤아려보았다. 물론 이 세계가 실제 존재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읽는 동안 잠시, 존재하는 듯 느껴졌다.

베르자흐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보이고 공간의 경계도 없다. 그러나 삶이 꽉 끼는 셔츠만 같다는 것은 오직 시간과 공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야만 깨달을 수 있다. 죽은 자들의 왕국에서 진정한 행복은 육신이 없는 영혼이라면, 산 자들의 영토에서 가장 큰 행복은 영혼 없는 육신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죽은 다음이 아니면 알 수가 없다. 고매한 신을 향해 기도했다. 우리에게 천국에서는 육신 없는 영혼을, 그리고 이승에서는 영혼 없는 육신을 베풀어 주십사고. (p. 57, 베르자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세계. 연옥을 뜻한다)

죽음과 삶의 역설 속에서, 씁쓸하면서도 묘하게 평온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이후로, 다음을 알 수 없는 불완전한 삶과 그 안의 모순을 굳이 다 이해하려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이 문장에 마음이 더 붙들렸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낯선 세계처럼 느껴지는 16세기 오스만 제국과 그 시대를 살아간 세밀 화가들의 감춰진 감수성까지, 꽤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오르한 파묵은 좁은 골목의 그림자, 집 안의 속삭임,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빛까지 하나하나 살아 숨 쉬는 순간처럼 담아냈기 때문이다. 때론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맞닥뜨려 당혹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이 또한 나 자신이 피할 수 없는 내면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통해 느낀 조용한 감정의 소통, 그게 이야기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장면은 줄거리 속 중심이 아니어도, 마음속에 오래 남아 우리를 조금 더 섬세하게, 조금 더 깊이 바라보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이름은 빨강》은 내 삶과 감정을 비춰보기에 충분했다. 물론, 재미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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