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곰돌이님의 서재
<악마의 시 1> 중에서...

생각해봐, 스푸노, 그려보라고, 도시락 서른 개 마흔 개를 담은 길쭉한 나무 쟁반을 머리에 이고, 기차가 멈출 때마다 일 분 이내로 다녀오지 못하면 기차를 놓치고, 그때는 트럭 버스 스쿠터 자전거 기타 등등을 요리조리 피하며 전속력으로 하나둘, 하나둘, 도시락이오, 도시락, 자, 도시락 지나갑니다, 그러다가 장마철에 기차가 고장나면 철도를 따라 냅다 달리거나 허리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게다가 불량배들이 있어서, 살라드 바바, 정말이야, 조직적인 도시락 도둑패였는데, 워낙 굶주린 도시니까 어쩌겠나, 하지만 우린 놈들을 너끈히 처리했지, 우린 어디든 없는데가 없고 무엇이든 모르는 게 없었으니, 어떤 도둑인들 우리 눈과 귀를 피할 수 있었겠나, 경찰을 찾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우리 스스로 동료들을 돌봐줬으니까.- P37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브릴 파리슈타가 살라딘 참차에게 말했다. "다시 태어나려면 우선 죽어야 해. 나야뭐 반쯤 죽었을 뿐이지만 그런 일을 두 번이나 겪었으니, 병원과 비행기에서 말이야, 합산하면 한 번은 죽은 셈이지. 그러니까 스푸노, 친구. 지금 여기 빌라예트의 진짜 런던에서 자네 앞에 서 있는 나는 다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새사람이라고, 스푸노, 이거야말로 기차게 멋진 일이잖아?"- P57
지니가 소리쳤다. "입 닥쳐! 그런 얘기는 뭣하러 해? 안 그래도 이사람은 우리를 무슨 야만인이나 열등한 인종처럼 생각하는데."
한 가게에서는 근처 크리슈나 사원에서 태울 백단향과 함께 분홍색과 흰색 에나멜을 바른, 삼라만상을 볼 수 있다는 ‘크리슈나의 눈’을 팔았다. 부펜이 말했다. "봐야 될 게 너무 많죠. 그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P92
보름달이 진 후 동트기 직전의 어둠, 바로 이때가 그들이 나타날 순간이다. 굽이치는 돛, 번뜩이는 노, 기함의 뱃머리에 우뚝 선 정복자, 따개비가 즐비한 나무 방파제와 뒤집어놓은 몇 척의 경주용 보트 사이로 덮쳐오는 함대.-오, 한때는 나도 많은 일을 볼 수 있었지, 옛날부터 그 능력을 가졌으니, 환상을 보는 눈을. 정복자는 코를 덮는 쇠붙이가 달리고 끝이 뾰족한 투구를 쓰고 그녀의 집 앞문으로 들어서고, 케이크 스탠드와 등받이 덮개를 씌운 소파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고, 마치 이 추억과 갈망의 집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메아리처럼, 그러다가 고요해진다. 무덤처럼.- P205
참차는 생각했다. 우리는 높이 오르려고 노력하지만 천성이 우리를 배반한다. 왕관을 얻으려 하는 어릿광대. 벅찬 슬픔이 밀려왔다. 한떄는 나도 더 명랑하고 더 행복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지. 그러나 이제 내 혈관 속엔 검은 물이 흐른다.- P263
이 임시 고향에서는 밤낮없이 중앙난방을 최고 온도에 맞춰놓고 창문도 꼭꼭 닫아놓는다. 망명객은 데시의 건조한 더위를 잊지 못하므로 이렇게 흉내라도 내야 한다. 마치 갓 구운 차파티에서 버터가 떨어지듯 달빛마저 뜨겁게 뚝뚝 떨어지는 그곳, 과거의 땅 미래의 땅. 그리운 땅이여, 해님과 달님은 남성이되 그들의 뜨겁고 감미로운 빛에는 여성의 이름이 붙는 그곳이여. 밤이 되어 망명객이 커튼을 가르면 낯선 달빛이 방안으로 스며들고 그 차가움은 쇠못처럼 눈을 찌른다.- P320
잔디밭에 떨어진 알라트의 시체는 차츰 오그라들어 이내 검은 얼룩만 남는다. 그리고 데시의 수도인 이 도시의 모든 시계가 일제히 종을 울리는데, 열두 번을 넘어, 스물네 번을 넘어, 천 번하고도 한 번을 넘어, ‘시간’의 종언을 선포하며 때를 알린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각, 돌아온 망명객의 시각, 물이 포도주를 이겨낸 승리의 시각, 이맘의 ‘비非시간’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각.- P331
그는 오비디우스를 버리고 루크레티우스를 선택했다. 변하기 쉬운 영혼, 만물의 가변성, 자아, 그 모든 것. 삶을 살아가는 존재는 살면서 많이 달라져 아예 타자가 될 수도 있다. 역사로부터 분리되어 개별적 존재가 된다.-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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