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제끄의 간이역들에서 살아가려면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파멸한다. 스텝은 광대하고 인간은 비소(小)하다. 스텝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며 누군가가 곤란에 처해 있건 사정이 두루 다 좋건 그런 데는 상관하지 않는다. 스텝이란 결국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언제까지고 무심할 수가 없다. 그는 자기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라면 더 행복할 터인데도 다만 운명의 장난으로 거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는 거대하고 가차 없는 스텝 앞에서 좀 더 진득하게 참질 못하고 의지를 잃는다. 마치 샤이메르젠의 삼륜차 배터리가 전압을 잃어 가듯이, 그 차 주인은 차를 손질하기는 해도 그 차를 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차는 마냥 세워져 있을 뿐이고, 얼마 안 있으면 배터리가 다 닳아 시동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로제끄의 어느 간이역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P21
그는 자기가 늙은이로 변할 때까지 여기에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때때로 그 시절의 오래된 사진들을 들여다볼 때면 지금 그의 모습은 얼마나 형편없이 달라져 있는가! 그는 반백의 노인으로 변했고 이제는 눈썹까지도 하얗게 세었다. 그의 얼굴 모습 역시 변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체중이 불지는 않았다. 그 기간을 죽 지나오면서 처음엔 그는 구레나룻을 길렀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턱수염을 길렀지만 이제는 말끔히 면도를 해버린 탓에 얼굴이 휑해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 시절로부터 한 시기의 모든 역사가 다 지나가 버렸다고.- P48
이제 관자놀이의 실핏줄처럼 중동 지방의 거대하고 누런 스텝 한쪽 끝에서 다른 한끝까지를 가로지르는 가느다란 실과도 같은 그 철도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러나 아직은 그 핏줄이 고동을 멈추지 않았고 기차들은 계속 오가고 있었다.- P116
예지게이는 그 자신에게, 그가 이 가족을 대신해서, 마치 그들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느끼는 분노와 쓰라림에 놀랐다. 그들이 과연 그에게 누구였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이건 내 일이 아냐.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 판단을 내리거나 편을 들려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을까?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스텝 지방의 사내 -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속이 뒤집혀야 했을까? 어째서 그가 세상일이 옳거나 옳지 못하다는 문제로 그의 양심을 괴롭혀야 했을까? 분명히, 아부딸리쁘의 곤경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그보다, 부란니 예지게이보다 천배는 더 잘 알 것이다. 그들은 사로제끄에 뚝 떨어져 있는 그보다 사리를 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그것이 그의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는 평온해질 수가 없었다.- P174
만꾸르뜨로 변해 버린 아들을 보고 나이만-아나는 괴로워하며 미칠 듯한슬픔과 절망 속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네 비명이 사막을 가득 채웠을 때, 밤낮으로 애타게 신을 부르고 몸부림치며 헛되이 하늘의 도움을 기다렸을 때, 네 고통받는 몸에서 뿜어져 나온 가래로 숨길마저 막히고 네 발작으로 뒤틀린 몸의 역겨운 배설물로 더럽혀졌을 때, 그 더러운 오물에 빠져 이성을 잃고 구름같은 파리 떼에게 시달리며 뜯어 먹힐 때 - 그때 네가 어찌 마지막 숨을 몰아 이 버려진 세상에 우리들 모두를 태어나게 한 신을 저주하지 않았겠느냐?
어둠의 그늘이 고통으로 갈가리 찢긴 네 영혼을 영원히 덮어 갈 때, 억지로 부서진 네 기억이 지난날과의 연상을 영원히 잃어 갈 때, 거친 몸부림 속에서 네 어미의 모습과, 네가 어릴 적 뛰어놀던 산중의 개울물 소리를 잊어 갈 때, 네 황폐한 의식 속에서 네 자신의 이름과 네 아버지의 이름을 잊고 네가 둘러싸여 자랐던 사람들의 얼굴이며 네게 얌전히 미소 짓던 처녀의 이름마저 희미해져 갈 때 - 그때 너는 어찌 바닥 모를 망각의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져 내리면서 고작 이런날을 살게 하려고 너를 자궁 속에 품었다가 신의 빛 속으로 내질렀다며 가장 지독한 욕설로 네 어미를 저주하지 않았겠느냐?」- P185
그가 통나무로 엮어 만든, 높이가 사람 키만큼이나 되고 튼튼한 쇠사슬로 잠긴 문을 채 다 열기도 전에 까라나르가 그를 밀쳐 넘어뜨리더니 사납게 울부짖고 으르렁거리며 그 길쭉한 다리를 한껏 뻗어 달려 나왔다. 그러고는 탄탄하고 검은 혹을 흔들어 대며 쏜살같이 스텝으로 내달았고, 잠시 뒤에는 발굽에 채어 오른 구름 같은 눈에 가려 흐릿해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염병할 놈!」 낙타 주인이 뒤에다 대고 욕을 해댔다. 그러나 다음에는 진심 어린 동정이 배어들었다. 「그래, 달려라! 서둘러라, 이 바보야. 안 그러면 너무 늦을 게다!」- P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