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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님의 서재
  • 기나긴 하루
  • 박완서
  • 13,500원 (10%750)
  • 2012-01-20
  • : 5,885
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읽고 나면, 유독 말수가 적고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시는 법이 없는 우리 외할머니의 가슴에 담아둔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다. 윤이 반질반질하게 나는 이야기라도 하나 있으면 꺼내볼까 싶지만, 그렇고 그런 얘기밖에 없어 구지레하게 느끼기라도 할까 봐 그러실까, 아니면 백날 떠들어봤자 네가 뭘 알겠느냐는 생각인 걸까. 그저 온화한 미소를 띠시며 조용히 뉴스를 보시다가 “배라 처먹을 놈들!!”이라며 한 번씩 욕을 해서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게 전부다. 자주 뵈러 가지를 못해서 할 말도 없는 주제에, 우리 할머니도 속 시원하게 얘기 좀 해주시면 오죽이나 좋아라며 욕심을 내는 게 양심에 찔린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개코도 모르면서 떠든다고 된통 혼내실 것 같은 매콤함이 느껴지는 박완서 작가님! 때로는 억센 말투와 날카로운 묘사가 불편하게 다가오고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괜히 마음이 힘들고 머릿속이 복잡함으로 꽉 차 있을 때, 아니꼽고 치사스러운 감정까지 막힌 코를 뚫어주듯 속이 다 시원하게 드러내서 머리털 하나 뽑아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는 그 ‘따꼼함’이 세상 개운할 때가 있다.

공부를 못하는데다가 산동네 아이 티가 더덕더덕 나는 촌스러운 옷차림을 한 아이는 자연히 외톨이 신세였다. 그러나 그걸 그닥 고통스러워한 것 같지는 않다. 동네 아이들과 다른 학교를 다니니까 으슥한 인왕산길을 혼자서 등하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걸 즐기면 즐겼지 무섬을 탄 것 같지도 않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공상을 할 수 있었다. 그 길은 어린 날의 나의 꿈길이었다. 구질구질한 산동네와 나보다 잘난 아이만 있는 교실로부터의 해방구였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p. 28)

꿈 많은 소녀에게 단념이란 없었다.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던 글쓰기에 결실을 보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 증언의 욕구는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헤아려 본다. 어쩌면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우리가 모두 평생 이해하지 못할 감정이기를 바라시진 않으셨을까? 색깔로 나누어진 삶 속에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자유를 훼손당하며 하룻밤 사이에도 내 식구가 사라지고 땟거리를 위해 남의 집 담을 넘어야 했던, 그래서 가슴팍에 악다구니만 남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어떤 심정인지 더는 아무도 알 수 없기를,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마음이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의 또 다른 작품인 <나목>에서 자신이 우월감과 열등감 덩어리였다고 고백한 것이 기억난다. 사는 것을 재미나게 살고 싶은 그 마음을 꼿꼿한 자존심으로 눌렀던 이십 대 시절, 구질구질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때로 잠시 가본다. 전쟁으로 오빠를 잃었던 것처럼, 한순간에 행복했던 순간을 무너뜨리게 만드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 말이다. 그땐 이보다 더 큰 시련과 비극은 일어날 수 없을 거라고 가슴을 치며 하루하루를 버텼을 텐데, 세월이 흘러 비통하게도 남편을 잃은 같은 해에 어린 자식마저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중요했기에 외아들 하나 지니지 못했나 하는 수군거림이 슬픔보다 더 큰 수치심으로 다가왔다는 속마음 또한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차라리 하느님과 정면대결을 하려고 수녀원에 들어가 독방 차지를 하고 있어도 보았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벌을 주셨나 항의도 해보고, 나도 아들 곁으로 데려다달라고 처절하게 기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내 절규는 하느님의 견고한 침묵의 변죽도 울리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 하느님과의 일 대 일 대결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피조물은 길든 짧든 창조주가 정해준 수명에서 일 초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깨달음을 질책보다 더 엄혹했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p. 35)

이제부터 울고 싶을 때 울면서 살 거예요. 떠내려갈 거 있으면 다 떠내려가라죠, 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꾸미는 짓도 안 할 거구요. 생때같은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에서 소멸했어요. 그 바람에 전 졸지에 장한 어머니가 됐구요.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 수가 있답니까. 어찌 그리 독한 세상이 다 있었을까요, 네 형님? 그나저나 그 독한 세상을 우리가 다 살아내기나 한 걸까요? 아니 형님, 지금 울고 계신거 아뉴? 형님, 절더러는 어찌 살라고 세상에, 형님이 우신대요? 형님은 어디까지나 절벽 같아야 해요. 형님은 언제나 저에게 통곡의 벽이었으니까요. 울음을 참고 살 때도 통곡의 벽은 있어야만 했어요.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대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p. 208)

나는 종교도 없을뿐더러, 인간 외의 존재를 떠올리며 살아본 적도 없었지만, 딱 한 번 신을 향해 간절히 요청해 본 적이 있다. 어느 곳을 향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그저 딱 한 번만 부탁을 들어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동안 없던 믿음이 지금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염치도 없고,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람이 급하면 무언가라도 찾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한참 동안 답을 주기를 기다리다가 ‘바뀔 수 없다는 것에 매달려서 무너지지 말자. 그래, 나의 운명적인 소명이 어딘가에 있을 거다.’라는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 무엇을 찾으려 했던 걸까 라는 물음에 현실에 맞는 답이 되고, 위로가 되어 반걸음 나아갔던 기억을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끌어내 주었고, 이것도 또 다른 인연의 형태라 여기며 감정을 주고받아 보았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알 수 없는, 알아서는 안 되는 가슴 속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사연과 함께 박완서 작가 본인의 진짜 이야기가 미사여구 하나 없이 진실한 언어로 쓰여져 있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글이었다. 펑펑 울고 싶었던 누군가가 그동안 혼자 얼마나 많은 눈물을 감추었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서, 잘만 살다가 괜히 삐끗거리며 ‘내가 지금 여기 왜 있는 걸까?’라며 불쑥 찾아온 냉기로 시려진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그래, 위로가 필요했다면 이걸로 됐지 싶다. 추운 겨울날 마음의 난로가 ‘띡’ 하고 켜진 듯한 이 순간을 오롯이 즐기기만 해도 충분하지 싶다. 여운이 오래 남았던 이야기 위주로 적다 보니, 사뭇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이야기들만 담겨있나 싶겠지만 그렇진 않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동안 박완서 작가님의 에세이 한 편과 장편소설 몇 편만 읽어봤는데, 이번 <기나긴 하루>에 수록된 단편 또한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모두 좋았다. 좋았다고 말하는 게 내가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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