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자기가 일상에서 느껴온 것들을 찾고 싶어 한다. 작가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가 느껴온 것 말이다. 문학의 신비로운 힘은 여기서 나온다. 모든 작품은 누군가가 읽기 전까지는 단지 하나의 작품일 뿐이지만,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작품이 된다”
한창 더운 7월의 어느 여름, 위화의 <인생>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벌써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와 따끈한 붕어빵을 먹으면서 배 속이 뜨듯해지는 것이 딱 이대로 자면 참 좋겠다 싶은 계절이 와버렸다. 나는 곰이라서 동면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니 입이라도 즐겁게 맛있는 간식을 옆에 두고 <허삼관 매혈기>를 펼쳤다. 작가의 서문이 참 좋다. 독자를 향해 감사의 말을 담은 개정판의 서문인데, 책과 나의 거리를 가깝게 좁혀주는 말 한마디가 동면에 들어가지 못한 곰 한 마리의 마음을 스르르 움직이게 했다. 뒤로 이어진 서문에 또 콧구멍에서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게 만드는 작가의 말이 이어졌지만, 나도 나름대로 부끄러움이 있는 곰인지라 생략할 수밖에 없겠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을 때, 부엌에서 외할머니가 이것저것 만들고 계시길래 뭐든 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병에 걸려 사람들을 귀찮게 하던 내가 묻고 또 물었다. 찌개에 톡톡 넣는 하얀 가루의 정체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미원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궁금했다. 설탕 같기도 하고 소금 같기도 한 가루의 맛이 어떨지.
“할머니, 미원은 무슨 맛이야? 짜? 달아?”
“무슨 맛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음식에 조금씩 넣는 애야, 얘는.”
“아니, 그래도 어떤 맛이 있을 거 아니야. 응?”
“흐음... 순수한 맛?”
꼬맹이가 순수한 맛이 어떤 맛인지 당최 알 도리는 없고, 나중에 TV에서 조미료는 몸에 안 좋다며 음식에 넣지 말아야 한다는 둥 안 좋은 쪽으로 이야기하는 걸 주워들은 내가 어린 마음에 ‘우리 할머니는 나한테 몸에 안 좋은 걸 넣어서 음식을 만들어 주셨던 거구나….’라며 배은망덕한 오해를 하기도 했다. 먹을 땐 좋다고 뱃속으로 집어넣었던 할머니의 음식이 그릇으로 몇 그릇인지 새지도 못하고 기억도 못하는 녀석이 말이다. 이제는 할머니가 말한 순수한 맛이 어떤 뜻인지 알아들어도 열두 번은 더 알아들을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생생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직도 웃음이 새어 나온다. 허삼관 이야기를 좀 들여다봐야지 했는데, 책장을 넘기자마자 허삼관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는 바람에 갑자기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고, 지나간 삶을 추억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잠시 누려봤다.
“저 장가나 가버릴래요.”
삼촌의 외밭에 가서 온종일 죽치고 있다가 수박 두 통을 해치우고는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허삼관이 피를 팔러 가는 근룡이와 방씨를 우연히 만나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피 팔아 벌어온 돈 삼십오 원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가 장가나 가버리겠다고 한다. 힘을 들여 번 돈이 아니라 제 피를 팔아서 번 돈, 말 그대로 피 같은 돈이니 허투루 쓰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성안의 생사 공장에서 누에고치로 가득 찬 수레를 미는 작업을 하고 지내는 허삼관에게 예비 신부 후보가 둘씩이나 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볼우물까지 있는 큰 눈을 가진 임분방이 1번! 뒤이어 간이식당에서 꽈배기를 튀기는 예쁘장하게 생긴 허옥란이 2번! 수박이나 먹을 줄 아는 사람인지 알았더니 패기가 넘쳐 황주 한 병과 담배 한 보루 들고 허옥란의 집에 찾아가 허씨 가문의 대를 잇게 해 준다며 데릴사위를 자청한다. 결국 허옥란이 허삼관에게 시집을 가는데 이 소식을 알려주는 장면을 읽고 한 몇 초가 지났나? ㅋㅋ 분만대에 누워 있는 허옥란이 진통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난 속으로 ‘아, 벌써 임신해서 출산하는구나.’ 했는데 두 번째 출산이란다. ㅋㅋㅋ 이렇게 낳은 자식이 5년 동안 아들만 셋. 그들의 이름은 허일락, 허이락, 허삼락이다. 이름 짓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 이 아이들이 어느새 훌쩍 자랐고, 하루는 싸우고 들어온 삼락이를 위해 형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해 보겠다며 이락이가 식식거린다.
“이런 씨팔, 감히 내 동생을 얕보는 놈이 있다니. 가서 그 자식 손 좀 봐줘야겠는걸.” (p. 78)
뭐, 물론 내 맘처럼 세상이 잘 돌아가 준다면 좋으련만….
팔뚝에 주삿바늘을 꽂고 피를 뽑아 돈을 받아 결국에는 허옥란과 결혼까지 하게 된 허삼관이 십 년 만에 다시 병원을 찾아 피를 팔아야 할 지경에 처한다. 말해봐야 입만 아프고 속만 터진다. 쪼잔하고 옹졸하기로는 어디 가서 안 빠질 허삼관은 허삼관대로, 부인은 부인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조용할 날이 없지만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바뀐다. ‘아니, 이런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라고 놀랄 만한 상황도 자다가 목이 말라 찬물을 들이키고 다시 드러눕는 것만큼이나 대단하지 않은 일처럼 받아들이고 산다. 허삼관이 때론 앞에서 화통 삶아먹는 소리를 하며 화를 더 긁고 말로 다 까먹기도 하지만, 자기 배만 채우려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아는 사람이기에 사람 마음을 참 와따가따 하게 만든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 참혹한 상황에서 허삼관네 가족의 상황도 다르지 않으니,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며 멀건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배고프다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자식들에게 움직이면 배가 고프니 조용히 누워 있으라고 다그치다가, 피골이 상접한 자식들의 모습이 짠했는지 허삼관은 상상의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말로 만들어내는 요리를 아이들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듣고 있다. 쓸데없이 요리 과정은 어찌나 생생한지 모른다.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이 아니고서야 웃으면 안 될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 이 꽉 깨물고 웃음을 참아야 하도록 만드는 것은 정말 위화가 손가락 안에 드는 것 같다.
가혹한 운명과 공평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위화는 버티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시대의 아픔을 비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고통 안에서도 좌절 대신 나름의 즐거움을 찾길 바라는 듯이 글을 써내려갔다. 그의 또 다른 소설 <인생>과 시대적 배경이 비슷해서인지, 남루한 모습으로 자신과 닮은 소 한 마리 끌고 밭에 나가 쉬고 일하고 쉬고 일하는 것을 반복하던 노인 ‘푸구이’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구구절절 긴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다 읽고 나면 투박스럽고 억척스러운 모습에 손사래를 치게 만들고, 뜻이 맞지 않는 일만 점점 늘어나는 내 집 식구들을 들여다보는 눈길에 애정이 한 스푼 더 들어가게 되고, 괜히 뭐라도 하나 챙겨주고 싶게 만들어주는 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자네들, 먼저 이 소금을 좀 먹어봐. 소금을 먹어서 입 안에 짠맛이 돌면 그때부터는 어떤 물이든 다 마실 수 있거든.” (p. 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