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보다 더 긴 것은 무엇일까? 하루가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P80
낮이다.
습지는 안개를 뚫고 나온 태야의 노란 빛줄기로, 차가우면서도 희부연 빛으로 해쓱하다.
안개가 걷힌 습지는 태양 아래 다시 액체로 흐른다.
완전히 낮이다.
키 큰 황금빛 갈대들이 반짝이는 습지 위의 낮이다.
공포에 질린 눈을 한 벌레들이 지친 습지 위의 낮이다.
삽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
옮기는 여자들은 점점 더 끌개를 낮게 끈다.
인간 형상의 벌레들이 죽어가는 습지 위의 낮이다.
흙덩이는 들어 올리기 불가능해진다.
이것은 낮의 끝까지의 낮이다.
허기, 열병, 갈증.
이것은 저녁까지의 낮이다.
허리는 고통 덩어리다.
이것은 밤까지의 낮이다.
얼어붙은 손들, 얼어붙은 발들.
이것은 태양이 저 멀리 성에로 만든 수의(壽衣) 속 나무 형상을 어슴푸레 빛나게 하는 습지 위의 낮이다.
이것은 영원을 향한 낮이다.- P80
"봤어? 봤어?튤립이야."
모든 시선이 그 꽃에 쏠린다. 여기는 얼음과 눈의 사막인데,
어떻게 튤립이. 창백한 두 이파리 사이에 분홍빛이 어떻게.
우리는 그 꽃을 바라본다. 얼굴을 후려치던 싸락눈을
우린 잊는다.
하루종일 우리는 그 튤립을 생각한다.
아침에, 호수 길로 나가는 교차로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희망의 순간을 만났다.
그것이 어장을 관리하는 SS의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추억을, 그리고 아직도 다 말라 없어지지 않은 우리 안의 이런 감정을 증오했다.- P98
심장은 추위로 졸아들고, 오그라든다. 오그라들어
아프다. 갑자기, 뭔가가, 내 심장에서 부서진다. 심장이
흉곽에서, 그러니까 심장을 제자리에 위치시키는 주변의
모든 기관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같다. 나는 내 안에서
떨어지는, 갑자기 떨어지는 돌 하나를 느낀다. 그것이
나의 심장이다. 경이로운 행복이 몰려든다.
차라리 이 취약하고 까다로운 심장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
어쩐지 가벼워지며 몸이 이완된다. 행복의 가뿐함이 이런 것이겠지. 모든 게 내 안에서 녹는다. 행복의 액체성이 밀려온다. 나는
다 내려놓는다. 죽음에 나를 내맡기니 너무나 달콤하다.
사랑보다 더 달콤하다. 다 끝났다는 것을, 고통받는 것도,
투쟁하는 것도, 더는 뛸 수 없는 이 심장에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도 다 끝났다는 것을 알고 나니.- P104
우린 서로 떨어지고 싶지 않다. 우린 서로를 보호한다. 동기 옆에 머물고 싶어 한다 자기보다 더 약한 동기 앞에, 그래야 그녀를 향한 매를 대신 맞을 수 있으니까. 약한 동기 뒤에, 그래야 넘어지려는 그녀를 붙잡을 수 있으니까.- P143
난 철저히 소유한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죽음과 대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쓸모없는 지식이다.
존재한다고 믿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닌 어떤 세계에서
그 모든 지식은 알게 된다 해도 쓸모없다.- P328
어떻게 해야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를 해체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과거에 붙들리지않고, 벽에, 사물에, 추억에 부딪히지 않을 수 있을까?
동시에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어. 점도가 없는 것처럼.
점도는 없는데 베일 것 같았어. 모든 것에 멍이 들었고,
온몸이 다 퍼런 멍 자국으로 뒤덮인 기분이었어. 실제로는
피부의 어디도 아프진 않은데도.
그 이후... 나는 어떻게 해냈던가? 이따금 나는 그걸 묻곤 해.
잘 모르겠어.- P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