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곰돌이님의 서재
다시 가을이 왔구나 했는데, 벌써 가려나 보다.
시린 찬 바람이 여전히 낯설고 와닿지 않는 이별을 더 실감 나게 한다. 예전에는 어려웠지만 지금은 조금 가능해진 게 있다면 ‘좋은 것’을 붙잡고만 싶어하지 않고 놓아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해마다 다 함께 오던 장소에 인원수가 달라져 몇 년 만에 다시 오니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영 쉽지가 않았다. 모두가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리움 탓에 어쩔 수가 없으니 말이다.

굳이 애써 놓아주지 않는 것도 있다.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바닥에 피어 있는 들꽃의 예쁨마저도 찾아내고 알아봐주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인 엄마는 “꽃도 지면 다시 피는데…” 라며 모처럼 내색을 한다. 멈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놓기까지의 망설임을 알 수밖에 없기에 더 세게 팔짱끼며 안아주었다. 애쓴다고 놓을 수 없는 마음은 서로 더 따뜻하게 품어주면 되니까!

머릿속을 떠다니는 말들이 우리의 침묵을 채우는 동안 정년퇴직 이후로 아빠의 십팔번이 된 “가장 긴 하루하루를 산 것 같은데 지나고 나니 순간이야.” 이 말 한마디가 공간을 메우며 나와 엄마의 슬픔을 가져가려 한다. 낯간지러운 말은 여간해서 내뱉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 건넨 서로를 위로하는 이 말 속에 담긴 뜻이 다시 원동력이 되어 내 사람들에게 행복한 시간과 추억을 더 많이 만들어주고 싶은 욕심을 품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영상으로 이 순간을 기록한다. 사진도 좋지만 사진보다 더 좋은 건 영상이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예전에는 내가 카메라만 들이대도 부끄러워하고 정신 사납다고 뭐라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누구도 뭐라 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촬영에 응해준다. 서로 같은 마음인 거다.


이제니 <새벽과 음악>중에서...

잊지 않기 위해서. 잃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 기억하기 위해서. 무언가 간직하기 위해서. (p. 17)

도착하는 순간에야 알 수 있는 것을, 그 무엇을 기다리면서. 매일의 책상 위에서. 삶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흐릿한 믿음에 의지한 채로, 모든 순간을 다시 의심하고 부정하면서. 알고 있는 이름을, 얼굴을, 표정을, 색깔을, 소리를, 거리를, 공간을 잊고. 마치 처음 본다는 듯 이 세계를 바라보면서. 손가락과 심장으로. 순간속에서 순간을 향해. (p. 224)


읽고 싶었던 책을 구매하면서 허전함을 채우려 했나 보다.
올해 읽었던 책 중 더 읽어보고 싶은 작가의 책과 그동안 궁금해했던 작가의 책 몇 권을 골라봤다. 아무래도 내가 꾸준히 관심을 갖는 키워드가 전쟁, 혁명, 디아스포라, 차별 등이라서인지 경계에 선 자들의 이중적인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과 애환을 담은 이야기를 가까이하는 것 같다. 좀 더 폭넓게 접하고 싶은 욕심도 없지 않아서 다양하게 읽으려고 시도를 조금씩 하고 있다.


<저항의 멜랑콜리>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앞서 읽었던 <사탄탱고>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저자의 묵직한 메시지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실존적 불안으로 인한 무력감과 절망감으로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겪고, 더 나아가 신체적으로도 문제가 생기는 일이 이제는 흔한 증상처럼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들여다보는 동안 집착으로 가열된 내 마음을 식혀주지 못한 채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해소되지 않는 불안함을 느꼈던 과거를 떠올려보기도 했던 것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항의 멜랑콜리>도 책장을 넘기자마자 낯선 공간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과 함께 밀려오는 공포감, 이 음울한 분위기가 끌린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행복한 해결을 기대할 실질적인 근거는 아주 빈약했지만 플라우프 부인은 낙관론의 거짓된 유혹에 저항 할 수 없었다. 기차는 어딘지 모를 곳에 또다시 정차하고 몇분 동안 줄곧 출발 신호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차분하게 ‘무언가 그래도 진척을 보이고 있다’ 위안 삼으며, 규칙적인 브레이크의 끼익 소리에 따라오는 정지의 시간마다 날선 조바심을 억눌렀다. (p. 18)

그 많은 뜬소문, 그 소문을 주워섬기는 그 많은 사람을 접한 뒤에, 이제는 직접 제 눈에 ‘모든 것이 못쓰게 되었다’는 현실이 생생히 보였다. (p. 27)


<프레스코> 서보 머그더

등장인물이 남긴 여운이 오래갔던 <도어>와 <아비가일>을 읽고 나서 계속 기웃거리기만 했는데, 오후 일정까지 깨고 밥푸리 김밥 한 줄을 드시면서 다 읽어버리셨다는 Falstaff님의 100자 평에 구매를 더 미룰 이유가 없는 듯하여 이번에 모셔왔다. 책을 펼쳐 책장을 넘기는 데 반가웠다. 서보 머그더의 글을 읽을 때 느꼈던 음... 뭐랄까.... 저자의 성품인지 모르겠으나 파고드는 감정 속에서도 뚝뚝하지 않은 산들산들함을 느꼈던 그 기분을 다시 느껴서였다. 담고 있는 내용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때 마침 아버지는 제네바에 가 계셨고 한 열흘은 지나야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계 개신교 국제회의에 우리 지역을 대표해 참석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것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두가지의 희망. 그것은 주교가 되는 희망과 아들을 하나 얻는 희망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9년 전에 그는 이 희망을 가슴속에 품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두 가지가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아들 이슈트반 대신에 딸 어누슈커가 태어났고, 그 뒤를 이어 바로 아내가 정신병에 걸린 것이다. (p. 59)


<자유> 조너선 프랜즌

가장 최근에 읽은 <인생 수정>을 눈이 뻐근하도록 재미있게 읽었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앞부분만 조금 훑어봐서 알 수는 없지만 공감가는 인물이 아직 등장하지 않아서인지 <인생 수정>을 읽었을 때만큼 느낌이 오진 않는다. 아무래도 강간을 당한 딸에게 엄마가 취한 행동과 말 때문에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걸 거다. 더 읽어봐야 알 수 있으니, 눈의 뻐근함이 좀 가셔지거든 나중에 만나는 걸로!!

그 당시 그녀는 개인적으로 직접 칭찬을 듣는 게 너무 불편한 이유가 자기가 희생정신이 강하고 협동정신이 뛰어나서 그렇다고 믿었다. 필자가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라 칭찬은 음료수와 같은 거였다. 칭찬에 대한 갈증이 해소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걸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안 것 같다. (p. 75)


<뭇 산들의 꼭대기> 츠쯔젠

중국 소설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츠쯔젠의 <가장 짧은 낮>을 읽는 동안 중국 소설에 선입견이 있는 분들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드러내기 전에 자신의 서리와 눈은 온 마음을 다해 따뜻하게 녹여야 한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중국의 변방 지역 소수민족의 삶을 장편 소설로 담았다. 아름다운 문체로 담아내는 자연 풍경과 함께 펼쳐지는 때론 흠칫 놀랄 만큼 자극적일 수도 있는 상황,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인물을 통해 내 삶도 되돌아보게 만든다. 마음을 풀어지게 만드는 순박하면서도 응큼한 모습에 잠시 잔웃음도 지어보고 말이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이런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힘든 시기를 다 같이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 늘 어떤 힘을 얻게 된다. 읽고 나면 한결 기분도 좋아지고 말이다.

솥 안의 넓고 길고 고른 탕면에 비계 찌꺼기와 배추를 넣자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두 사람은 부뚜막 앞에 쭈그리고 앉아 후루룩후루룩 바닥을 드러내도록 먹어치웠다. 다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니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왕슈만은 트림을 하고 물을 한 바가지 떠서 얼굴을 씻고 난 뒤 보따리에서 복숭아색 저고리를 꺼내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신치짜에게 슬그머니 자신 같은 신부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열기가 끓어오른 신치짜는 고개를 끄덕일 새도 없이 왕슈만을 끌어안고 따사로운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p. 19)


<블러드 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흑인 여성 ‘다나’가 시간 여행이라는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닌 흑인 노예의 삶을 겪는 자로써 벌어지는 일을 담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재미있게 읽었다. 혐오스러운 인간에게 점점 순응하는 그녀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이 힘들었고, 다나가 어지럼증을 느끼며 다시 과거로 돌아갈 때마다 철렁거리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마침, 이 책이 눈에 띄는 바람에 겟겟!! 지구를 떠나 또 다른 공간에서 외계 생명체와 접촉하며 살아간다든지 임신을 하게 된 남자를 다룬 소재는 지금이야 낯설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이 소설의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가 발표된 시기(1984년)를 생각하면 그녀의 상상력이 놀랍다. 외계 생명체의 번식을 위해 선택된 인간의 몸에 알을 키우는 등의 SF적 요소 안에 담고 있는 가장 큰 핵심은 사랑과 희생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알았다. 평생 그 이야기를 들었다. 졸리고 조금은 기분 좋기도 한, 익숙한 침이 찔러들어왔다. 그다음에는 트가토이의 산란관이 눈먼 탐침을 들이밀었다. 고통 없이, 수월하게 찌르고 들어왔다. 너무나 쉽게 들어왔다. 트가토이는 천천히 파도치듯 움직이면서 근육에 힘을 넣어 내 몸속으로 알을 밀어넣었다. (p. 24)


이번에는 그동안 관심을 두고 있었던 작가의 작품들이다.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을 좋아한다. 일단, 도미니카 공화국을 32년 동안 통치한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의 만행과 암살 사건을 다룬 <염소의 축제>부터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한 <내 이름은 빨강>도 재미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추리 소설답게 도입부가 몰입력을 확 끌어올리면서도 예술과 미술이 내게는 친근하지 않아서인지 살짝 주춤하게 만들었지만, 이 소설이 품고 있을 ‘의미’가 궁금하다. 이슬람 미술의 특징 정도라도 알아보고 난 뒤에 읽어봐야겠다.

사실 이 책들보다 가장 읽고 싶었던 것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와 서보 머그더에 이어서 헝가리 작가인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헝가리 혁명(1956년) 이후 21살의 나이에 스위스로 망명했다고 한다. 책 앞부분의 줄거리만 조금 말해보자면, 전쟁 중 살 길이 막막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쌍둥이 형제가 할머니에게 맡겨진다.엄마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고 하지만, “전쟁은 오래갈 거다. 하지만 나는 저 애들에게 일을 시키면 되니까, 걱정 마라. 여기선 공짜로 먹여줄 수는 없다.”라는 칼날 같은 할머니 말 한마디에 이 형제의 앞날이 읽힌다. 그리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린 쌍둥이 형제의 삶이 사실적이면서도 담담하게 서술된다.


<염소의 축제>, <천국은 다른 곳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분노가 온몸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었고, 용암의 강이 머리까지 기어올랐고, 머리는 마치 탁탁거리며 불타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고 열까지 세었다. 분노는 통치하는 데뿐만 아니라 심장에도 나빴고, 까딱하다간 심근경색에 이를 수도 있었다. 지난밤에는 ‘마호가니의 집’에서 너무 분노가 치민 까닭에 미쳐버릴뻔 했다. 그는 곧 침착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는 분노를 통제하는 한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시치미를 떼고서 최악의 인간쓰레기들을 예의 바르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필요한 경우에는 배신자들의 아내나 아이들, 형제나 자매들에게도 그렇게 했다. 그것이 바로 그가 32년 동안 한 나라의 무게를 온통 어깨에 짊어진 채 다닐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염소의 축제>, p. 47)

“이 곳이 천국입니까?”
“아닙니다, 아가씨 천국은 다른 모퉁이에 있습니다.” (<천국은 다른 곳에>, p. 22)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p. 13)

나도 그림 속 사내처럼 나 자신만의 초상화를 갖고 싶었다. 아니, 내 주제를 알아야지! 내가 아니라 우리 술탄이 그렇게 그려져야만 했다! 술탄과 술탄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 그의 세계를 보여 주는 모든 것을 그리고 싶었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한 권의 이야기책으로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p. 59)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우리가 물을 가득 받은 물통을 언청이에게 내밀었다. 소녀가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왜 진작 날 도와주지 않았니?”
“네가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덩치 큰 세 녀석이 덤비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네 물통을 놈들 대가리에 던져버리든지, 손톱으로 얼굴을 온통 할퀴어놓든지, 불알을 발로 걷어차든지, 그도 저도 안 되면, 고함을 치고, 울부짖기라도 해야지. 아니면 아예 달아났다가 나중에 다시 오든가.” (p. 46)


<오래된 빛> 존 밴빌

내가 그녀의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여기 한 해가 소멸해가는 이 부드럽고 창백한 날들 속에서? 머나먼 과거의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우글거리고 대개는 그게 기억인지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둘 사이에 별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차이가 있다 해도,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기억을 만들어내 꾸미고 윤색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말을 믿는 쪽이다. ‘기억 여사’께서는 은근한 속임수에 대단히 능하니까. 돌아보면 모든 게 유동적이어서 시작도 없고 어떤 끝을 향해 흘러가지도 않는다. 적어도 내가 경험하게 될 끝을 향해서는, 최종적이고 완전한 정지라면 몰라도. (p. 14)


괜히 이것저것 적다 보니 출간 소식이 기다려지는 작가도 있어 적어본다. 독일계 러시아인들의 삶을 다룬 구젤 야히나의 <나의 아이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짊어진 무게와 불행한 삶 속에서도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었던 ‘빅토리아’라는 여성의 강인한 삶을 다룬 셸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도 너무 잘 읽어서 이들의 또 다른 작품도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한다. 이 공간이 지니의 요술램프는 아니지만 비벼보고 비벼본다... ㅋㅋㅋ 요즘 조금 마음이 헛헛했는데 새 책을 반갑게 받아들고 조금씩 읽어보는 동안 신나기도 하고 즐거웠기에 조금씩 또 내 온도를 찾아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나가는 가을을 아쉬워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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