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의미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윙윙대며 떠나지 않게 만드는 한 가족의 일상과 선택이 펼쳐진다. 저자 조너선 프랜즌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헤아려주지 못하고 살아온 이 가족 개개인의 마음을 ‘제대로’ 들어주고, 헤아려주고픈 생각인지 정말 집요하고 끈질기게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과 내면을 파고들며 글을 써 내려갔다. 누군가 내 삶에 대해 이토록 꿰뚫어 글을 써내려간다면? 이라는 상상만으로도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다. 견딜 수 없는 마음, 도무지 어쩌지 못하겠는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서인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에너지가 점점 소진되어 가는 것을 느끼기도 했고, 가족에게조차, 아니 가족이기에 나 자신을 숨기고 완벽하면서도 꽤 괜찮은 자식인 척했던 순간에서 여전히 떳떳할 수 없기에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진실을 명확하게 볼 수 없었음에도 안다고 생각하며 행동했던 과거의 죄책감까지 밀려와서일 것이다.
“목조 창틀을 댄 유리문으로 비치는 빛은 잿빛일지언정 대초원의 낙관주의를 품고 있었다. 천 킬로미터 이내에는 대기를 교란할 바다가 없었다.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오래된 오크 나무의 자세는 돌발적이고, 야생적이고, 도도하여 영원을 내다보는 듯했다. 울타리 없는 세상에 대한 기억이 이들 가지에 필기체로 적혀 있었다”
노년을 즐기는 은퇴자들로 갑판마다 활기가 넘치는 럭셔리 크루즈를 타고 있는 남편 ‘앨프리드’와 아내 ‘이니드’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자신들이 사는 곳이자 고향인 미국 중서부에 있는 세인트주드에서 자식들과 다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안락하고 편안한 인생을 누리고 사는 가족으로 여겨지지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극복해야 할 속사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단해 보이는 어깨에 두 손을 살포시 얹어 사람의 온기만 건네도 마음이 사르르 녹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이니드와, 파킨슨병에 걸려 점점 더 인격이 황폐해져 가고 늘 상상도 못한 완전히 새롭고 낯선 실존 속에 내던져지는 삶의 연속인 앨프리드.
겉보기에는 서부의 온화한 날씨를 닮은 듯한 이니드는 동부 도시 출신의 남성과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우아한 결혼식과 피로연을 열어주길 기대했던 필라델피아의 잘나가는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활약하고 있는 막내딸 ‘데니즈’가 몬트리올 출신의 키 작은 중년 유대인 셰프와 법원에서 결혼했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처음으로 위에 탈이 났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녀가 딸의 이혼 소식을 들었을 때의 심정은 말해 무엇할까.
부익부 빈익빈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둘째 아들 ‘칩’은 종신 교수직을 박탈당한 뒤, 개당 3달러 89센트였던 아보카도 다섯 개를 집어 들고는 이내 다시 내려놓고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악몽 속에서 지내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안에 가격이 붙은 물건들은 유행을 내세우며 “지금은 쇼핑하러 갈 때야!!!”라고 외치도록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고, 이런 허영심과 욕망이 들끓는 세상 속에서 여동생 데니즈에게 빌린 돈으로 불안감을 잠시 숨겨줄 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술을 마시고 여자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건강과 활기를 원하는 순간에 머물러 있는 할말하않 칩의 일상과 선택을 들여다보는 것을 시작으로 내 눈도 서서히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돈과, 돈 없는 삶의 치욕이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과 핸드폰과 양키 캡 모자와 SUV는 하나같이 고문이었다. 그가 탐을 내거나 시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돈 없는 그는 제대로 된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 (p. 158)
사방에서 새로이 탄생한 백만장자들 수백만 명이 특별함을 누리겠다는 동일한 목표에 매진했다. 빅토리아시대의 완벽한 제품을 구입하고, 그 누구의 흔적도 없는 비탈에서 스키를 타고, 유명 셰프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고, 발자국 하나 없는 해변을 즐겼다. 게다가 돈은 없으면서도 완벽한 쿨함을 추구하는 젊은 미국인들이 수천만명이나 되었다. (p. 289)
취미생활 목적으로 650달러짜리, 그것도 겨우 650달러라면서 카메라와 장비를 사달라며 조르고 있는 아들을 포함해 세 아이 아빠이자 은행 중역인 원칙주의자 장남 ‘개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필요 없을 만큼 경제적 빈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 중서부를 벗어나 쿨함을 장착하고, 이상적으로 균형 잡힌 가족의 모습을 만들고 유지하려 애쓰는 그의 삶은 어떨까? 대다수 서민의 시선에서는 넘치는 과잉으로 쾌감을 상실한 자가 한가하게 정신적 고민과 사투를 벌인다고 냉소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점점 갈수록 과민과 불안으로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상태에 놓여 있다. 어린 시절 부모의 불운한 결혼 생활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인생을 읽었을 개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전한 형태로 주고받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얻게 된 해결되지 못하고 묵힌 감정들로 홀로 사투라도 벌이는 중인 걸까...
이 가족에게 지금 필요한 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잡지에서 할인 쿠폰을 오리는 엄마 이니드의 모습과 식료품점에서 감초와 함께 고른 ‘행운의 요정’ 인형을 산 둘째 아들 칩의 모습에서 지금 이 가족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들은 단순히 재미와 당첨의 의미 이상의 삶의 위로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욕심이 자기 비하로 연결되는 모습과 함께 미래의 불안함을 잠재워줄 만한 요인이 어느 하나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버리지 못하는 희망을 품는 두 사람의 모습과 더불어 이 가족의 현 상황이 안타까웠다. 타인의 삶을 함부로 규정해서는 안 되며,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과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받아들이는 것 또한 차이가 있을 테지만 내 시선에는 그렇게 보였다. 부모와 자식 간의 문화도 다르고 소통 방식도 다른 것은 이 집만의 일이 아닌, 보통 가정의 모습일 거란 생각에 더 이입되어서인지 뭔가 계속 가슴이 저릿하게 만들었다. 특히, 서로에게 감정이 소진된 사람처럼 온기를 잃은 첫째 아들 개리와 아빠 앨프리드가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는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것만 같은 좁은 공간 안에 질식할 듯한 무거운 공기만 꽉 채울 뿐, 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 수가 없었다.
“아빠는 삶에 만족하나요? 더없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개리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물었다.
“개리, 나는 고통받고 있어......”
“많은 사람이 고통받죠. 그게 이유라면 좋아요. 그래서 스스로를 안쓰러워하고 싶다면 그것도 좋아요. 하지만 왜 엄마까지 끌어들이죠?”
“삶에는 그저 견뎌야만 하는 것이 있어.”
“그런 생각이라면 굳이 왜 사나요? 대체 뭘 기다리는 거예요?”
“나도 매일 그 질문을 한단다.”
“그럼 답은 뭔데요?”
“네 대답은 뭐냐? 너는 내가 뭘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부자의 표정이 읽힌다. 지난 과거를 부정적으로만 해석하며 앨프리드와 정반대의 삶을 살겠다는 의식적인 결단을 내리고 지내온 듯한 개리는 자신이 아버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 있지도 않은 에너지를 억지로 쥐어짜면서까지 맞춰 가며 이룬 안정된 가정을 보란 듯이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감상으로 자기 확신을 얻기 위한 개리의 몸부림과 대비되는 앨프리드의 담담하고 절제된 감정에서 독자가 스스로 공허함과 먹먹함을 느끼도록 표현한 부분이 이 소설의 압권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많이 참아주고 인내하며 살아왔을 테지만, 여전히 듣고 싶은 얘기에만 귀 기울이고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는 이 가족은 인내심을 가지고 조절을 해 봐도, 밥 한 끼 먹기조차 어려워 보였다. 이제는 억지로 맞추려 할 것도 없이 암묵적 합의를 통해 그들이 지내온 모습 그대로 시간을 흘려보낸다. 각자의 생각과 감정들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허탈한 관계 속에서도 낙관적인 희망을 발견하게 된 나는 이들 가족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면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을 텐데, 이들은 분명 각자의 방식으로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인하고 밀어내 보지만, 가슴 속에서 펄펄 끓고 있는 절실함과 간절함이 있기에 아프고 상처받는 것이 아닐까?
흘려보낸 것들 속에는 분명 다가가기 위한 노력과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끌어올린 용기, 그리고 역시나 변하지 않음을 구태여 눈으로 확인한 뒤 얻은 허탈한 마음까지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삶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헤매면서 쾌락과 자극을 좇기도 하고, 물질 지향적 삶에서 나름 충족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지내기도 한다. 그러나 삶의 가치는 내면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모두 다 안다. 알지만 흔들리고 죄책감을 느끼며 혼란을 겪는 사람들의 숨이 막힐 듯한 심경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저자는 한 가족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다층적인 의미로 해석해 볼 만한 이야기를 소리 내어 숨 쉬는 것조차 잠시 잊은 채 집요하게 파고들 듯 극도로 집중하며 보게 만든다. 눈이 몹시 뻐근했다. 그러나 이 부분이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내가 느낀 쾌감의 요인 중 하나였다고 말하고 싶다.
연약하면서도 역겹기도 한 극심한 내면의 고통과 비참함을 느끼면서도, 인간은 결국 한 발자국 스스로 내딛게 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온전히 나로 살 수 없다는 서글픔을 뒤로 하고 나를 살리기 위한 삶의 내디딤의 시작일지라도 말이다. 참아야 하고 견뎌야 하는 것이 많았던 과정에서 자신이 받은 상처를 위안 삼아 이기적이었던 타이밍의 내가 취한 행동으로 사로잡히게 된 죄책감을 덜어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또다시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건네지 않는가? 온전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나는 이 모습도 사랑의 또 다른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으로부터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새로운 삶의 기류와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