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보 머그더 이후 두 번째로 만나는 헝가리 작가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작품 <사탄탱고>는 제목에서도 느껴지는 강렬함이 책의 도입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미 절망적인 감정을 넘어 그 어떤 것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고 회복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이 허공을 향해 흩뿌리는 부정적인 말들이 확신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요람과 관의 십자가에 결박되어 경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 그는 결국 냉혹한 즉결심판을 받고 어떤 계급 표식도 부여받지 못한 채, 시체를 씻는 사람들과 웃으면서 부지런히 피부를 벗겨내는 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차 없이 인생사의 척도를 깨닫고 말리라, 돌이킬 수도 없이. (p. 15)
공허함으로 가득 찬 헝가리 시골의 버려진 집단농장. 이곳 주민들은 외부의 위협에 공포를 느끼고 불안감 속에서 제대로 된 일상을 살지 못하고 있으며, 시큼한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집과 바닥 곳곳에 자라나는 잡초는 이곳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기보다는 떠나야 하는 곳처럼 느끼게 한다. 매일 밤 대야에 담긴 따뜻한 물을 간절히 바라는 남자, 집 안에서 나는 악취를 느끼지 못한 채 바깥을 감시하며 사람들에 대해 기록하는 일에만 온 정신을 기울이는 의사, 고함을 지르며 짐차에 짐을 싣고 몰락한 이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들.
이 소설은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낯선 세계에 서서히 진입하다가 완전히 몰두하여 잡념이 머릿속에 끼어들 여지가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는, 독서를 통한 몰입 그 자체의 황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줄거리는 핵심 사건을 피하고 간략하게만 적으려 한다.) 특히, 긴 호흡 안에 담긴 인간의 심리를 앞선 발자국을 따라가듯 똑같이 진창길을 밟으며, 시월의 찬 바람에 날리는 그 모든 것을 낚아채고 휘어잡으며 구덩이에 빠져버린 것들까지 모두 갈고리로 끌어올리듯 구석구석에 남겨진 잔상까지도 음미해보길 감히 권해본다.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리는 비를 맞고 들어온 한 노인, 차장 ‘켈레멘’이 암묵적으로 마을의 집합소가 된 술집으로 들어와 젖은 모자를 벗고 쥐어짠 다음, 술집 주인이 내민 독주를 마신다. 그리고 분명 기대하는 것이 있는 마을 사람들은 그가 새로운 소식을 들려줄 것이라는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모든 질서가 깨져버린 이곳에서 변화가 있기를 바라며 불확실성 속에서 들뜬 마음으로 노인의 말을 기다려본다.
누군가에게 확신을 불어넣고 그의 덧없는 실존을 온전한 존재로 고양시키는 기억은, 어떤 사태로부터 기억 자체의 질서에 따라 실마리를 끄집어내고 기억과 인생 사이의 거리를 단지 그 기억을 지니고 있다는 경직된 만족감으로써 무마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p. 128)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 이 두 사람이 죽은 게 틀림없다고 믿었다. 두 사람의 부활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면서도 이들이 다시 마을에 돌아온다는 소문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의 가망 없는 상황을 구제해줄 목자 이리미아시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라며 다시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그건 그렇고, 켈레멘이 들려줄 말이 꽤 있을 것 같은데 어째 속도를 내지 않는다. 속이 탄다. 인내심을 가져본다. 어차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하루하루가 똑같은 날들의 무력함 속에서 기대감을 갖게 되었으니 변화를 간절히 바래본다. 그러나 그 기대감조차 헛된 생각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마을 사람들이 제각기 갖는 절망감은 술집 문틈으로 막아보려 해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과 함께 이들을 에워싸고만 있다. 굳이 의미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게 만드는 이 무거운 공기 속에서 어둠이 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듯 그저 숨죽여본다.
끝나가는 시월의 밤은 고유한 리듬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말이나 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질서에 따라 나무들을, 비와 진창길을, 노을과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을, 피로하게 움직이는 근육을, 정적을, 구부러진 길과 풍경을 두들겼다. 머리카락은 무리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몸과는 다른 리듬을 따랐고, 성장과 몰락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수없이 두들기고 되울리는 한밤의 소리들은 짐짓 절망을 가리는 한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한 장면 뒤로 불현듯 또 다른 것이 모습을 드러내고, 눈에 보이는 경계를 넘어서면 현상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졌다. 마치 영원히 닫히지 않는 문처럼, 틈이, 균열이 있었다. (p. 132)
살인적인 가을과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겨울 그리고 요란하지만 충족을 주지 않는 봄 (p. 147)
사람이 집중하다 보면 당연히 모든 감각 기관이 활발해지지만, 책을 읽는 동안 나를 가장 예민하게 만든 것은 청각이었다. 이 소리에 굉장히 민감해지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둘러싸인 공간을 채우고 있는 불분명한 것으로부터 여러 위험성과 가능성을 감지하는 사람들을 긴장한 상태로 들여다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긴장감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지도 못한 채 상대의 감정을 파악해 가며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의 하루가 누군가의 힘이나 기분에 따라 결정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이 막강한 힘을 자신에게 방망이 휘두르듯 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이고, 내 언니들이며, 내 오빠였던 소녀 ‘에슈티케’가 등장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람은 감히 아래에서 위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듯 사람의 기분에 맞추어 살아가야 했던 사람에게 용기를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슈티케는 경험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이런 연약한 소녀의 복잡한 내면까지 읽고 그 순한 마음을 거침없이 낚아채가는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기 때문이다.
에슈티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희망을 앗아가게 만드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가벼워지고 싶어 하는 소녀가 조금 숨을 쉴 수 있도록 정적이 시간을 내어준다. 그렇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이런 에슈티케에게 전쟁으로 두 눈을 잃고 장터나 술집에서 하모니카를 불어서 번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소년 ‘코린’이 말을 건넨다.
“눈이 먼 다는 건 아주 멋진 일이란다, 얘야.” (p. 167)
숨죽인 채 살아가는 사람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비극과 닮은 쉼 없이 긴 호흡의 문장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다. 덧없는 삶에서 벗어나려 해봐도 발이 푹푹 빠지는 진창길에서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절망적인 이 세상을 드러내기만 했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이 삶을 아무 소용이 없게 만들었다.
소녀는 고양이의 눈에서 공포와, 무력한 짐승의 고통을 보았다. 절망적인 고양이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은, 자신을 먹이로 내줌으로써 어쩌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고양이의 두 눈은 어둠을 가르는 스포트라이트처럼 지난 몇 분의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소녀와 고양이가 한데 엉켰다 떨어졌다를 거듭한 싸움의 순간들을. 소녀는 자신이 천천히 고통스럽게 쌓아 올린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p. 174)
내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보고 싶었던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소녀의 울음이었다. 어른들도 살아가기 힘든 이 세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차라리 소리 지르며 으왕 하고 울길 바랬다. 에슈티케의 눈물 대신 세찬 바람과 함께 차가운 비만 내린다. 고성을 지르고 괴로움을 온몸으로 내비치는 모습보다도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더 괴로웠다. 모든 것이 평온해지고 괴로움이 사라지기까지의 소녀의 숨 막히는 현실을 우리는 똑같이 숨죽인 채 지켜만 봐야 한다. 우두커니 서 있는 바보처럼 말이다.
비통한 바람이 부는 황폐한 마을에서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실존적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실리를 쫓아 움직이고 서로를 경계하며, 비난하고, 조롱하면서도 불안과 혼란 속에서 절박하게 ‘구원’을 바란다. 점점 커지는 기대가 불러온 허상이 사람들에게 솔깃한 말로 속삭이고, 매혹적인 안도감에 금세 현혹된 사람들은 다시 내일이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한다. 과연 이들은 어디에서 확신을 얻은 것일까.
라슬로는 나약한 영혼을 꿰뚫고 유혹하는 사람과 마음을 움직이는 말 한마디에 낙관적 편향에 빠져 객관적으로 구분할 능력조차 상실한 자들의 삶의 줄을 당기며 서로 의지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불안한 관계 속에서 겪는 갈등을 통해 인간 본연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황량함으로 온몸이 무겁게 눌려진 채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고통에 나는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묻는다.
두려움에 찬 눈을 그냥 감아버리겠는가?
깊숙이 파고드는 통증을 잊기 위해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믿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