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해야 할 일을 마치면 그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 순간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듯, 쳇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삶을 살아가는 한 가족은 현재의 소박한 삶에 감사함을 느끼고 속에 들어찬 서글픔은 서로를 위해 잘 포장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잠든 부인 옆에서 쉽게 잠에 들지 못하는 남편 ‘펄롱’은 오늘의 평범한 일상을 누리지 못한 채 왜인지 심란해 보인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걸까. 앞으로 닥치게 될지도 모를 그 무언가를 고민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방황하는 사람처럼 복잡함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큰 집에 혼자 사는 여성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지내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펄롱은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날 선물로 아버지와 500피스짜리 퍼즐을 받고 싶어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어린 펄롱에게는 간절했고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글픔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내리려 했지만, 내색하면 안 될 것 같아 외양간으로 뛰어 들어가 울어버렸다.
젖소가 자기 칸 안에 묶인 채 선반 위의 건초를 끌어 내려 만족스러운 듯 먹고 있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펄롱은 말구유에 언 살얼음을 깨고 세수를 했다. 아픔을 잊기 위해 손을 차가운 물에 깊이 담그고 손에 아무 느낌이 없을 때까지 한참 그러고 있었다. (p. 30)
펄롱이 아기였던 시절, 구슬처럼 빛나는 맑은 눈으로 들여다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윌슨의 집 정사각형 부엌 안에서 일해야 하는 엄마가 위험한 것들로부터 조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을 유아차의 안전띠에 매인 아기 펄롱이 알아들을 수는 없었겠지만, 공중에 대고 허우적거리는 손짓과 음성은 쌓이고 쌓여 자신이 마음껏 양팔을 휘젓고 소리 내는 것이 누군가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더 자라서 윌슨이 가끔 같이 쓸 수 있게 해주는 거실을 가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처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 먼지가 내려앉듯 그렇게 펄롱의 성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쌓여만 갔을 것 같다.
그렇게 펄롱은 자랐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날 농장 일꾼 ‘네드’가 준 보온 물주머니와 윌슨이 준 곰팡내 풍기는 낡은 책 <크리스마스 캐럴>은 그 당시에는 원하는 선물이 아니었기에 서럽게만 느껴져 외양간으로 달려가 눈물을 쏟았지만,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니 그 덕분에 오랫동안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에게 필요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집 크기와 보이는 행색에 따라 쳐다보는 시선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숙덕거림 속에서 가족들도 외면한 어머니를 일할 수 있게 해준 윌슨이 따뜻하게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해 준 그 손길만으로도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쳐 온 생을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소설 속 주인공 펄롱이라면 불행했던 삶 속에서도 그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준 순간들을 발견했을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라나는 동안 누군가에게는 사소할지 모를 배려와 관심이 단순한 행동을 넘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줬음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어느 날, 펄롱은 수녀원에서 한 소녀를 우연히 만난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 보였고,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기에 외면하지 않고 그 소녀에게 손길을 건넸다.
그 순간 소녀의 심정을 떠올려보았다.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늘 그곳에 그가 있을 거라는 안심만으로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고마움과 안도감으로 이미 따뜻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펄롱이 어린 시절 윌슨이 머리카락을 따뜻하게 쓰다듬어주던 그 손길만으로도 다른 아이들처럼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내 이름은 빌 펄롱이고 저기 부두 근처 석탄 야적장에서 일해. 무슨 일 있으면, 거기로 찾아오거나 아니면 나를 불러. 일요일만 빼고 늘 거기 있으니까.” (p. 82)
유한한 삶을 살아가며 오늘의 평온만을 원하는 삶에서 더 나아가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 해 준 고마운 순간들을 과거의 기억으로만 끝내지 않고 현재와 연결 지어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채우는 것이 무엇인지 고뇌하며 소녀에게 손길을 건넸으나, 펄롱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 의지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이 겁이 났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져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감수해야 할 것들도 훨씬 많기 때문이다.
내내 이어지는 서리가 내린 듯한 날씨가 마치 금방이라도 맑게 갤 하늘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게 했다. 무시할 수 없는 여러 목소리에 휩싸여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마치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무겁기만 하고, 집에 돌아가면 밖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내놓는 몇 파운드의 동전을 못마땅해하는 부인과 다른 친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러 나가고 싶지만 내색도 못하고 아빠 펄롱의 일손을 돕기 위해 사무실을 봐야 하는 딸이 기다리고 있다.
이 소설은 불완전한 삶 속에서 세상의 불의 앞에 고민하게 될 때, 인간이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나의 지난 삶의 선택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마음의 소리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늘 최대한 평온함을 유지하며 살고 싶어 했으며, 그나마 합리적인 쪽을 택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스크롤 내리는 손가락의 속도만큼이나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기사들 사이로 지금, 이 순간도 지옥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나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한기가 느껴지는 날씨처럼 침울함을 견디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이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만 머물러 있는 쪽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지만, 사실이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늘 어떤 경계에서 고민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내적 갈등과 감수해야 할 현실로 가슴 속이 꽉 막혀 있을 때, 늘 타인의 생각과 판단을 배경으로 했던 지난날의 내 선택들을 되짚어보니 원하는 대로 흐르는 듯 보이는 강을 바라보며 침묵과 용기 사이에서 고뇌했던 펄롱의 모습이 현실의 내 모습 같아서 공감할 수 있었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p. 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