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작가님의 책은 인물이 남긴 잔상이 오래가는 편이다.
<아직 멀었다는 말>에 소희, <각각의 계절>에 마리아, <안녕 주정뱅이>에 수환과 영경이는 여전히 내 주변을 채우고 있는 사람처럼 멀지 않게 느껴진다.
이들의 삶을 통해 나의 위선을 확인하면서 그동안 소홀히 하고 놓치고 있던 내 주변에 가까운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후회와 미안함을 느끼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렇듯 지금까지 읽은 작품이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내 마음의 틈을 열어주었다면, 이번에 읽은 <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각각의 상황 속 세밀한 감정들을 느껴보면서 스스로 돌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나의 시간을 끄집어내고, 현재의 감정을 살펴보며 좀 더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책에 담긴 7편의 단편 모두 애써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읽어 내려갔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얕은 잠에서 잠깐 깼을 때, 완전히 내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찰나의 순간마저도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흘려버리지 못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장을 읽을 때면, 여기저기 붙어 있는 묵힌 감정들을 날카로운 것으로 싹싹 긁어서 한데 모아 남김없이 탁 털어내는 것만 같았다.
시곗바늘이 돌면서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 시침과 분침이 시시각각 낯선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잠을 자면서, 밥을 물에 말아 먹으면서, 책을 읽으면서,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들으면서 흘려보낸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몸이 나아지고 마음이 아물고 시나리오를 다시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프지 않고 울지도 않고 글을 다시 쓰게 될 그 시간, 그때의 시곗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게 될지 알지 못해 그녀는 못 견디게 불안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거칠고 두터운 시간이 흘러갔다. (p.34)
사회 초년생 시절, 모든 것이 불안정했지만 완벽하고 싶은 마음에 무모한 열정을 앞세워 이리 돌리면 이리 돌려지고 저리 돌리면 저리 돌려지듯 휩쓸리면서 앞질러 가는 이들을 쫓아가며 사느라 참 바빴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은 자연스레 익숙해지고 서서히 현실과 타협을 하게 되며 이내 줄어든 열정은 다른 곳에 쏟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랑. 그리고 사람이 복병이었다.
현재의 나로부터 해방시켜줄 만한 자기만의 공간에서 건져 올린 기억 속에서 사랑과 실연의 극복 또한 참 다양할 것이다. 일이든 사랑이든 극에 달했을 때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치졸함, 이 치졸함이 결국 나를 위한 극약처방이자 유일한 해결 방법이었던 그 시절을 화끈거리며 떠올려본다.
누구나 그렇듯 대단하지 않은 것에 흔들리고, 별거 아닌 일로 극복하는 삶을 반복하며 사는 것 같다. 그런데 너무 내 감정에만 치우쳐 있다 보면 누군가의 감정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지나쳐 버린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무망감이 희망으로 방향을 틀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겪는 고통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민감한 인식을 가진 저자가 우리에게 조금은 시리지만 담담하게 위로의 말을 던진다. 그리고 이 위로의 말은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고 삶의 여러 영역에 걸쳐 있는 말로 다가온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p. 80)
이 소설은 자꾸만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게 만든다.
그래도 괜찮을 것만 같다.
내가 탄탄하게 다지고 쌓아 올린 이성의 끈을 조금도 놓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어느 하나도 남김없이 터트리고 싶은 이중 심리로 복잡할 때도 있다. 그럴 땐 고민 없이 책을 들고 여러 감정을 느껴보는 그 자체가 많은 도움이 된다. 한 감정에 오래 머물러서 굳어질까 봐 조금 우려스러운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던 때가 있어서인지, 생각이 멈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나에겐 비극일지도 모른다.
꿈속에서도 이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꿈에서 깨고 나자 금방 잠들면 또다시 그 꿈이 이어질까 봐 억지로 피곤한 눈을 부릅뜨고 현실의 공기를 충분히 마신 뒤, 꿈이라서 너무 다행이라는 안도의 숨을 내쉰 뒤에야 다시 잠에 들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나의 반응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현실을 살 때는 아무리 깨고 싶은 꿈을 꿔도 그따위는 너무 아무것도 아닌 거다.
이제는 흐릿하게 맴돌았던 기억들이 투명한 물 위에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하나, 둘 드러나는 이야기가 예전보다는 조금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질 때도 있다.
이때 나는 느낀다. 빛이 바랬다는 것을.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 (p. 118)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갖가지 감정들을 직접 읽어보며 충분히 느껴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줄거리를 생략했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던 그리고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그 마음을 대신해 주는 이야기로 가득했던 소설이었다.
그리고 저자의 글은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느낀 내면의 서늘한 고독을 끌어내는 고유의 결이 내 감정에 더 솔직해지고 싶게 만들고, 이 과정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내 몸에서 비워야 할 게 있다면 우선 드러내 보는 것도 방법이겠구나 싶다.
아슬아슬한 조화를 이루며 불안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남긴 흔적에는 환멸감, 자격지심, 둔감한 무관심, 분노, 증오가 흩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거창한 무언가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기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떠올랐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보잘것없는 것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이 나를 얼마나 끌어올려 주고 변화를 일으켰는지를 말이다.
날씨도 자기 계절을 찾아가듯이, 나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를 조금은 느슨한 마음으로 지켜보려 한다.
“보이지 않는 건 아닌데 너무 초라하고 하찮아서 어디 한번 보자 하고 덤벼들 마음이 생기지 않는 그런 것들 있잖아. 그런 보잘것 없는 것들이 네 주위에 널려 있거든. 대상이든, 일이든, 남아있는 그것들에 집중해. 집중이 안 되면 마지못해서라도 감정이 그쪽으로 흐르도록 아주 미세한 각도를 만들어주라고. 네 마음의 메인보드를 살짝만 기울여주라고.” (p. 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