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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님의 서재
  • 나목
  • 박완서
  • 12,600원 (10%700)
  • 2012-01-22
  • : 3,057
박완서 작가님의 등단작이자 대표작 <나목>이다.

저자의 또 다른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읽은 지 오래되지 않아서 그때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당장에 배곯지 않는 내일이 중요해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음전한 올케와 남의 집 세간살이를 들쑤시며 먹을 것을 찾던, 그리고 향토방위대에서 만난 언니가 소개해 준 미군 PX 파자마부를 다니며 밥벌이했던 ‘나’가 떠오르고, 그때의 사람들과 분위기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첫 월급봉투를 당당히 내밀었던 ‘나’의 벅찬 감정까지도.


저자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이 소설은 1·4 후퇴 이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는 1932년생 ‘이경’이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흐른다.

왠지 마음 한 귀퉁이 모가 나 있는 듯한 그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전쟁 때문에 피폐해진 삶을 살았던 저자의 우울함과 무기력한 그때의 모습이 경아에게도 투영된 듯하다. 한 발 내딛기조차 어려운 막막한 상황에 마음속엔 뾰족한 가시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저자의 몇 권의 책에서 주인공 여성의 공통점이 있다면, 주눅이 들지 않는 당돌함과 솔직함이 아닐까 싶다.
남성 중심 사고 속에서 자기 삶의 방향이나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며 살고 싶었던 여성은, 이내 듣기 거북한 말 한마디 세차게 듣고 아랫입술을 잘근 짓씹으며 참아야 했지만 때때로 억압과 차별을 향해 보여주는 맹랑한 태도와 벌침 쏘듯 하는 말 한마디가 손에 쥐는 건 없어 성엔 안 차도 꽉 막힌 목구멍을 뻥 뚫어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한순간에 행복했던 삶이 무너졌다.

6.25 한 달 전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오빠마저도 폭격으로 잃었다. 산다는 게 간단치 않은 무게로 다가오고 구질구질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과 무기력한 감정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가치를 잃게 하여 삶이 무의미해지고, 신물이나 더는 반짝거림을 찾을 수 없게 되어 세상에 염증을 느끼게 된 상태. 그녀가 딱 그래 보였다.

(P. 44) 싫은 게 나인지 나 외의 남인지 어쩌면 그 모든 것인지 난 아무튼 나를 포함한 내 주위의 너절한 풍경을 종이조각 꾸기듯 마구마구 구겨 던져버리고 싶었다.

대학 시험에 실패하고 밥벌이를 위해 초상화부에서 사장 최만길에게는 미스리로 불리며 사업실적을 올려야 할 일에 달달 볶여야 하는, 늘 별반 다를 게 없는 오늘을 살아갔다.

황홀하고 매력적인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의 상품과 저녁 화장에 여념이 없는 세일즈걸들을 바라보기를 즐겼던 경아는 퇴근할 때 종업원 출입문에서 겪는 불쾌한 보초 순경들의 몸수색을 지날 때면, 집 근처라도 동행할 만한 친구 한 명이 무척 간절했다.
공포감으로 가득한 전쟁통 속에서 가족을 잃고, 살아남은 식구들은 당장 먹고사는 게 급급해서 각자의 슬픔은 가슴에 묻은 채 스스로 강해져야 했을 테지만, 어두운 골목길은 전쟁을 떠올리게 해 두려웠던 것이다.

자신이 퇴근할 때까지 먼저 잡수시지도 않고 기다리시다가 딸이 오면 그제야 밥상을 들여오는 어머니를 만나기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집을 향해 냅다 뜀박질해야 했다.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숨통을 조여오는 긴장감과 치닫는 공포감이 사람의 정신과 일상을 파먹어 구멍투성이가 되었을 불완전한 삶은 하루하루가 지옥이 아니었을까.

꼿꼿한 자존심만 남은 경아는 이제 고작 스무 살이다.
희망 끝자락에 딱 붙어 근근이 살아갈 힘을 얻으며 살아가야만 하기에는 팔딱팔딱 심장이 뛰고 활력이 넘칠 나이, 스무 살.
보석을 삼킨 듯 아름답고 현란한 색채를 띠며 재미나기만 하던 시절은 이제 익숙해질 수 없는 회색빛 우울과 외로움만 남은 채 전부 사라졌다. 전쟁이라는 험한 것이 경아의 기억을 제외 한 모든 것으로부터 그 빛들을 앗아가 버렸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되지 못할 자식 잃은 참척의 고통을 겪는 엄마의 심정을 모르진 않지만, 자신도 엄마의 자식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서운한 마음과 서로 물러서지 않는 고집까지 더해져 모녀간 갈등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되풀이만 되었다.

엄마가 고생한 만큼 더 잘 지냈으면, 속앓이하는 얼굴 그만하고 다시 밝아졌으면, 그런 엄마 얼굴을 바라보는 내 생각도 헤아려주고 나를 위해서라도 살아주길 바라는 분노 섞인 감당하기 벅찬 경아의 마음이 회색 벽에 부딪혀 바닥에 소리 없이 떨어졌다.
두 사람을 향한 나의 시선은 이내 먹먹함과 무력함 그 어딘가쯤에 가닿고 있었다. 무진 애를 써봐도 어찌 잘 안되는 관계, 이 두 사람이 그러했다.

(P. 22) 나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사는 것을 재미나 하고픈, 다채로운 욕망들은 이 완강한 고집 앞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또 한 명의 환쟁이 ‘옥희도’씨가 초상화부에 들어온다.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경아 시선에는 어딘가 고지식하면서도 자기 세계가 있어 보이는, 황량한 풍경이 담긴 눈을 가진 그가 다른 이들과 달라 보였다. 자신의 마음을 한 줌 털어놓고 상실로만 가득 찬 빈자리를 그가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던 걸까? 다섯 명의 아이와 아내가 있는 옥희도 씨를 향한 생각이 좀처럼 멈추지 않는 거다. 그가 가진 절망을 덜어내 주고 싶은 마음까지도.

아버지와 두 오빠의 부재가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들고, 가슴을 옥죄고 있는 돌덩이 하나라도 털어놓고 싶은 간절함의 세포들이 차곡차곡 쌓이기만 하여, 그녀를 이리도 연약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릇된 감정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나의 솔직한 마음을 무시하려 해도 갑갑함을 피할 수 없던 차, 짙은 고독을 앓는 경아에게 번지수를 잘 못 고른 남자 ‘한태수’가 나타난다.

전깃줄 다발을 든 채 실없는 농담을 하는 PX 전기공으로 일하는 태수는 떡 줄 사람의 생각도 모른 채 경아 주변을 맴돌며 언제나 껄껄대며 인사를 걸어왔다. 넉살이 좋아 경아에게 척척 들러붙고 속없는 사람처럼 너불너불 잘 떠들지만, 한 겹만 드러내도 그 속은 호젓하다 못해 쓸쓸했을 터.


선선한 바람 하나 불 것 같지 않았던 뜨거운 여름,
불볕더위에 잠 못 이룰 때는 어쩌다가 피부에 닿는 이불에서도 열이 펄펄 나는 것 같아 얼른 발로 옆으로 밀어버렸는데, 언제 이렇게 기온이 내려갔는지 자다가 썰렁함을 느껴 이불자락 한 번 더 끌어당겨 안고, 그간 설쳤던 잠을 몰아 자듯 잠을 깊이 자는 나 자신을 보니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살아가는 것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당장에 지붕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앞이 내다보이지 않아 갑갑하다가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뿜어대는 강인한 생명력이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이 돼 주어 각자 품은 결핍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하도록 마음을 식혀주고, ‘살아지는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해 주니까 말이다.

모두가 애처로운 소리를 내며 떨었던 그 암담한 시기를 들여다보며, 지쳐버린 절망과 회한의 삶에도 근심과 한숨을 삼키고 애쓰며 살아온 사람의 모습은 우리에게 강인함을 단단히 심어주지만, 어둠을 잔뜩 머금은 상황에서 어떻게든 적응하고 살아 나가야 했던 모습이 뇌 한구석에 깊게 박혀서인지 마음이 쉬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P. 124) 몇십 년이나 묵은 은행이 그 가을엔 왜 그렇게 처절하도록 노오랬던가. 난 그것을 보며 왜 그렇게 살고 싶고, 죽고 싶고를 번갈아 가며 격렬하게 소망했던가.


저자는 이 작품을 40세에 썼지만, 20세 미만의 젊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썼다고 한다. 그렇게 기억된다고.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을 만큼 눈앞이 깜깜하고 결핍 많은 삶을 살다가도 봄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추운 겨울 이겨 내고 자유롭게 뻗어있는 가지에 매달린 꽃망울을 보며, 그 작은 것이 품고 있을 생명력에 감동하는 벅찬 마음을 저자는 이 소설의 옥희도 씨의 실제 모델 박수근 화백의 유작전을 통해 느꼈다. 그 힘이 저자에게 열정의 불꽃을 피워 올렸고, 그와 같은 강인함과 벅찬 감동을 찾는 사람들에게 <나목>을 선사해 줬다.

‘진실한 이야기’의 힘을 통해 소박한 일상의 한순간을 더욱 값지게 여기는 감사함과 겸손함을 얻음과 동시에, 전쟁의 공포와 가난에 찌들어 대포 한잔할 새 없이 가족들 부양하느라 예술가로서 살아가기 어려웠던 이들의 열정과 그들을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던 사람의 마음마저 떠올려져 가슴이 뜨거워진다.

저자의 책은 읽고 나면 마음이 단정해진다.
흐트러져 있던 옷매무새 한 번 더 다듬어 볼 줄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나의 세계에서 내가 차고 있는 시계의 속도에 따라 움직이고 살아가겠지만, 혹독했던 삶을 버티며 살아온 사람의 모습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된다. 정작 내가 이루고자 했던 삶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만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삶은 아니었는지, 그것이 현재의 삶을 잡아먹고 있는 건 아닌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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