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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님의 서재

우리 식구는 향토방위대가 떠나기로 한 날보다 하루 먼저 떠났다. 그들의 목적지가 ‘거기‘라는 걸 빼고도 우리 식구의 피난 행렬은 남루하다 못해 기괴해 보였다. 여태껏 엄마의 자존심의 방패가 돼 주었던 싱거 미싱 대가리도 그 울퉁불퉁한 모양을 옷 보따리 사이에서 비죽대고 있었다. 미싱 대가리가 재산 목록 일호라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해서 창피할 건하나도 없었다. 오빠가 버젓이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앉음으로써 우리 식구의 피난 행렬은 아무래도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의 짓 같지가 않았다.- P167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니던 먹는 문제에서 놓여났는데도 여전히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살아 있다는 감각도 없었다.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그림자였다. 우리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동안인지 생각도 안 나게 오랫동안 빈곤, 악운, 질병 등 인간의 그늘만 독차지하다보니 드디어 표정을 포기한 그림자가 돼 버린 것이다. 마침내 편안해진 것이다.- P202
"쉬어서 버리면 안 되지."
엄마가 헛소리처럼 말하면서 팥죽을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둘러앉아, 사랑하는 가족이 숨 끊어진 지 하루도 되기전에 단지 썩을 것을 염려하여 내다 버린 인간들답게, 팥죽을 단지 쉴까 봐 아귀아귀 먹기 시작했다.-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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