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페이지의 가장자리를 접다보니 책의 오른쪽 귀퉁이가 불룩해졌다.
기억하고 싶은 문구들을 기록하고 싶어서 타이핑을 시작했는데,
이러다간 끝도 없겠다 싶어서 그냥 며칠간 또는 더 오래 어디든 이 책을 들고 다니기로 한다.
좀 더 부드러우면서도 여전히 찬란하고 강렬한 김이듬 시인의 시집.
맨 뒤의 에세이도 좋았다.
밑은 타이핑했던 짧은 부분들.
모든 하루가 역광이어서 세상의 사물들이 담담하면서도 깊이있게 보였다 하찮았다 사진을 찍어도 나오지 않았다
―「역광」 부분
아무에게도 헌정하지 않는 노래가 좋았다
서로를 돌보지만 바치지는 않는 삶에 관하여 생각한다
―「잘 표현되지 않은 불행 1」 부분
나는 가능한 입을 열지 않겠다 과묵한 게 아니라 화제도 지식도 없는 학자처럼 미소 머금은 거절의 말을 허락으로 이해하는 남자처럼
나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 많았다 나는 추락했으므로 나는 내 인생의 주인도 시위대도 아니고 친구들의 장난감도 아니고
삽시간에 사무친다
두상만 한 코코넛에 빨대를 꽂고 이래도 되나 사물의 형태는 변하지 않았는데 쓴물 단물 잔존마저도
―「비하인드 스토리」 부분
천변을 걷는다 추리닝 위에 코트 차림 춥구나 왜가리 한 마리 서 있다 외로운 느낌을 주려고 서 있는 게 아닐 텐데 외로울 것 같다고 나는 느낀다 부여하는 어떤 마음도 한 개 어휘와 매치가 안 된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시고 동일시하지 말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느라 멈춰섰지만 왜가리는 날아간다 날아가지 마 날 버리지 마 지난밤 술을 마시고
―「오해하는 오후」 부분
누구나 갖는 자연스러운 죄책감이란 자살하지 않고 오랜 생존이 가능했던 사람들의 잉여 감정 같다 버티기보다 물러서기 시작했다
내 스탠드 안에 나방들이 죽어 있다 빛에 젖은 날개가 부서졌다 좋아하는 것들이 나를 죽게 한다고 썼던 종이가 나를 파쇄했다
―「죄책의 마음」 부분
모든 하루가 역광이어서 세상의 사물들이 담담하면서도 깊이있게 보였다 하찮았다 사진을 찍어도 나오지 않았다- P18
아무에게도 헌정하지 않는 노래가 좋았다
서로를 돌보지만 바치지는 않는 삶에 관하여 생각한다- P57
천변을 걷는다 추리닝 위에 코트 차림 춥구나 왜가리 한 마리 서 있다 외로운 느낌을 주려고 서 있는 게 아닐 텐데 외로울 것 같다고 나는 느낀다 부여하는 어떤 마음도 한 개 어휘와 매치가 안 된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시고 동일시하지 말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느라 멈춰섰지만 왜가리는 날아간다 날아가지 마 날 버리지 마 지난밤 술을 마시고- P128
누구나 갖는 자연스러운 죄책감이란 자살하지 않고 오랜 생존이 가능했던 사람들의 잉여 감정 같다 버티기보다 물러서기 시작했다
내 스탠드 안에 나방들이 죽어 있다 빛에 젖은 날개가 부서졌다 좋아하는 것들이 나를 죽게 한다고 썼던 종이가 나를 파쇄했다- P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