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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밀한 사이
  • 케이티 기타무라
  • 15,120원 (10%840)
  • 2025-02-07
  • : 687
언어와 문화가 여러 갈래인 사람들은 그 나뉘어진 길 위를 정처없이 헤메면서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한다. 단 하나의 세계에 속한 사람도 자기 정체성을 고민한다. 그러다 대개 떠난다. 그리고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떠나옴 위에서 시작하는 이들은 돌아갈 곳이 없어 여러 갈래의 선택지와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그 자신의 서사와 장소를 기어이 발명해내고야 만다.

케이티 기타무라,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본 저자의 정체성이 이 소설의 분위기를 주름잡는 것 같다. 아마 중국은 아닐 아시아계 여성인 주인공은 중립국인 네덜란드의 재판소에서 통역가로 일한다. 야나라는 미술관 큐레이터 친구가 있고, 아드리안이라는 아직 결혼생활 중인(애도 있다) 연인이 있고, 그 아드리안을 고깝게 보는 케이스라는 변호사는 직장에서 마주치고, 직장에서는 반인도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기소된 범죄자들의 말을 통역해야 한다. 언어 사이에 탈출구가 없게끔 하는 작업을 업으로 삼은 이답게 주인공은 사람들이 대화 속에서 고의로 누락시키는 것들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아냐가 그와 아드리안을 집으로 초대한 상황에서 나눈 대화를 두고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녀는 아드리안에게 그의 일, 그가 거주하는 지역에 관해 몇 가지 물었는데, 그녀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무해한 질문들이었다. 그녀는 잠재적으로 낯 뜨거워질지 모를 영역 가까이로는 감히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94)

이렇듯 선, 거리, 균열지점을 정확히 짚을 줄 아는 주인공은 언어와 언어 사이의 진공,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공을 더욱 절감하게 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친구 아냐는 일로 바쁘고, 연인 아드리안은 전처랑 문제 해결하겠다고 리스본으로 떠나고, 아냐의 소개로 엘리너라는 새로운 이와 가까워지지만 그의 내밀한 사정을 알아버리는 바람에 더 가까워지지 못한다. 주인공이 여러 대화에서 적극적이라기보다, 참여하면서도 대화 자체를 관망하는 느낌을 받았다. ‘통역사’이기 때문일까. 한편 어느 아프리카 국가의 전직 대통령의 말을 통역하게 된 주인공은 양가적인 경험을 통해 분열을 겪는다. 그의 말을 옮기는 과정에서 끔찍한 짓을 저지른 그의 관점에 저도 모르게 입각한다든지, 그의 말을 고지곧대로 옮겨야 하는 가운데 그를 경멸하는 어조가 담겨버린다든지. 결국 자기는 “기질”적으로 이 일과 맞지 않다고 판단해서 승진 제안을 거절한다. “내면의 희생”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라면 내가 옮기는 말들에서 나의 의견과 감정을 분리해낼 수 있을까? 대변해야 하는 입장도 아니고 그저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데도 분리하기 힘들까? 난 가능할 것 같다. 이 문장을 지웠다고 다시 쓴다. 버스에 오르고 내리는 동안 고민했다. 가능할 것 같다. 그러면 글은? 인용부호 잔뜩 쓰면 가능할 것 같다. 아니다, 글은 오히려 힘들 것 같다. 나는 늘 나 중심적으로 글을 쓰기에, 나와 상관없는 글을 쓸 수 없다. 그래서 글에선 중의적이기 힘들다. 왜 말에선 가능할까. 고민해볼 일이다. 그리고 범죄자의 평정은 못 견디고 연인의 멀끔한 얼굴(잘생겨서 그런가?)은 견뎌보려는 주인공을 어떻게 이해해볼 수 있을까. 난 오히려 반대일 것 같은데. 내가 옮기는 말은 나를 관통하고 내가 듣는 그의 거짓말, 침묵, 회피, 혹은 진실은…. 모르겠다.

사실 이 소설 전반부부터 너무너무 재밌었던 나머지 원서를 장바구니에 담아뒀다. 번역도 참 매끄러워서 거슬릴 게 없었지만 그래서 더 원어가 궁금해졌다. 후반부로 갈수록 작가가 흩뿌려뒀던 잔잔한 캐릭터들의 서사도 완성되고 주인공 역시 운명과 선택을 향해 달려가지만 뭔가 전반부와 정보의 비대칭성을 이뤄서 그런가 후반부는 맥이 빠지는 느낌이다. 안톤은 왜 그렇게 주물럭대는 놈으로 결판났는지, 혹 여지껏 정제된 대화들과 대비를 이루기 위함인지, 케이스와 아드리안, 개비는 어떤 도파민 도는 썰을 가지고 있을지, ‘해변‘은 결국 주인공 마음속에 자리잡을 고향같은 장소가 될지 등등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감상이 많다. 그래서 꼭 언젠가 영어로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킨들을 사든 원서 종이책을 구하든.

마지막으로, 나는 모르고 저자 혼자 박식한 예술작품에 대해서 소설에서 함부로 묘사하는 걸 싫어하는데, ‘유딧 레이스터르’를 소개받아서 좋았다. “그 그림은 어떤 분열을 중심으로 작용하며, 화합할 수 없는 두 개의 주관적인 입장을 대변했다. 이 장면을 정열과 유혹의 장면이라고 믿었던 남자, 그리고 공포와 치욕의 상태에 내던져진 여자.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 분열이야말로 캔버스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진정한 불일관성이자,레이스터르의 시선에 담긴 진정한 그림의 대상이라는 것을.” 주인공이 끊임없이 겪는 ‘분열‘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소재로 쓰여 작품의 깊이감을 더해준다. 이 소설은 잘 쓰인 브이로그 같다. 주인공의 일상이 다소 예쁘다. 저자가 감각적인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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