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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낯선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
  • 정헌목.황의진
  • 16,200원 (10%900)
  • 2024-08-16
  • : 1,866
서평단 신청할 때 언급된 소설 전 작품 다 읽고 서평하겠다고 호기롭게 외쳤는데 자신 없었다. 당첨되면 생각하지 뭐. 이런 마인드였다. 그리고 당첨되었고, 다 읽었다!

하지만 정헌목의 탁월한 요약 덕분에 인용된 열 권의 작품을 굳이 읽지 않아도 이 책을 읽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듯하다. 글쓰기 교실에서 소설 읽고 요약하기의 모범사례로 보여줄 만큼 깔끔한 정리다. 정헌목의 요약 반 인류학적 해석 반으로 이루어진 여덟 편과 황의진의 탐사 보고서(?)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의진은 만약 SF 세계관 속에서 민족지 연구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학술적인 글을 썼다. 사이언스픽션과 앤트로폴로지가 교차하는데 나는 아무런 경계선을 발견하지 못 했다. 이미 SF는 어느 정도 인류학이 아닐까? 또 인류학은 SF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내게 인류학은 지구 권역에 스며드는 어떤 ‘유행’들을 경계하도록 경고해주는 학문이다. 서구의 것이 마치 지구의 표준인 양 퍼지고 있는 세계화를 시니컬하게 본다. 또한 지구행성 중심의 역사에서 인류라는 종의 위치를 가늠하고 주제를 파악한다. 그러는 한편 여전히 인류를 애정한다. SF와 판타지문학도 마찬가지다. 그 세계만의 작동방식을 현실에서 재현하고 구연하기엔 다소 우스꽝스러울지 몰라도 이미 그 자체로 고유하게 존재하는 세상이다. 난 사이언스픽션이 현실의 대안세계라는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기 이곳이고 ‘그곳’은 상상력이 풍부한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탄생한 허구일 뿐이라고 해도, 이미 우리는 그 세상에 빠져들지 않은가. 우리의 지독한 현실과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난 판타지에서 현실을 읽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두 저자의 합이 돋보이는 글은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을 다룬 것이다. 정헌목은 “성별을 제거하고 나면 착취와 전쟁이 없는 사회가 남는다”는 “사고실험”이라고 평했다. 황의진은 작품 속 주인공 겐리 아이(남성)가 아닌 어떤 ‘여성’이 게센 행성을 방문한다면 어떨까 상상하며 양성의 외계인 세상을 탐구한다. 동일 작가의 다른 작품 <<빼앗긴 자들>>도 소개되었는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은유로 읽을 수도 있고, 정반대인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끌어당김으로써 각자의 체제를 유지하는 ‘공존’으로 읽을 수도 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도 두 편 소개되었다. 르 귄이 타자와의 조우와 타자에 대한 예우를 다룬 정치적인 글을 썼다면 버틀러는 책임소재를 가지고 저글링하는 러브스토리들을 썼다.

SF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많은데, 과연 느끼는 대로 살고 있는가? 허물어진 경계, 연결된 관계를 일상에서 몸소 느끼고 있는가? 실천하고 있는가?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하겠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직 덜 읽어서 그럴까? 좀더 SF와 환상문학에 푹 빠져보고 다시 생각해보겠다. 나는 이제 버틀러와 르 귄의 전 작품을 읽을 것이라는 다짐과 미루고 미루었던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을 빨리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이 책을 덮는다.

일독을 권한다. SF가 궁금한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일단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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