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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45,900원 (10%2,550)
  • 2018-06-15
  • : 3,943

러시아의 귀족들은 조용한 응접실에서 전쟁을 이야기한다. 프랑스가 쳐들어온다, 황제께서 결단을 내리셨다, 전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살롱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는 이미 총성이 울리고 있다. 전쟁은 그렇게 한순간에 현실이 된다.


이 거대한 소설은 시작부터 독자를 19세기 초 러시아의 격동의 한복판에 던져놓는다. 피에르는 사색에 빠지고, 안드레이는 칼을 들고 나선다. 나타샤는 춤을 추며 사랑을 꿈꾼다.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소설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요동치는 인간 군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흘러간다. 영광도, 패배도, 젊음도. 전쟁과 평화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흔들리고, 변화하고, 때로는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지를 담아낸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고민과 갈등 속에서 방황하고, 성장하고, 때로는 좌절한다. 그들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나약하고, 모순적이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본다. 『전쟁과 평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깊이다. 그들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흐르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함을 지닌다.


피에르의 여정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구도의 길과 같다. 방탕한 젊은 귀족이었던 그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여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한다. 나폴레옹을 악의 화신으로 여겨 암살하려는 엉뚱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결국 이 또한 허망하게 끝나고 만다. 그러나 러시아군 포로로 잡혀간 그는 그곳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농민 병사 플라톤 카라타예프와의 만남을 통해, 피에르는 비로소 삶의 본질에 다가선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플라톤의 말은, 피에르에게 단순한 위로를 넘어 삶을 관통하는 진리로 다가온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 속에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재, 그리고 그 순간을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피에르와 대비되는 인물인 안드레이는 처음부터 야망 넘치는 군인으로 등장한다. 그는 전쟁에서 공을 세워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나아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마주한 드높은 하늘은,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준다. "저 높고 푸른 하늘에 비하면, 내가 좇던 영광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이 깨달음 이후 안드레이는 회의주의에 빠져 세상과 거리를 두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 리자의 죽음은 이러한 그의 염세관에 쐐기를 박는다. 그러나 보로디노 전투에서 다시 만난 나타샤의 헌신적인 간호는, 죽음을 앞둔 그에게 진정한 평화를 선사한다. 아마도 톨스토이는 이 장면을 통해 진정한 평화란 삶의 끝자락에서야 찾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나타샤는 등장할 때부터 생명력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그녀는 사랑을 꿈꾸고, 음악을 즐기며, 세상 모든 것에 마음을 열어둔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다. 안드레이와의 약혼은 전쟁으로  인해 파국을 맞고, 아나톨 쿠라긴과의 위험한 사랑은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나타샤는 더 이상 과거의 철없고 감정적인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고난을 딛고 일어서, 피에르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나타샤의 변화는 삶의 가혹함 속에서도 인간은 얼마든지 성장하고 강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전쟁을 미화하지 않는다. 아우스터리츠와 보로디노 전투 장면은 영웅적 승리의 서사가 아닌, 혼란과 죽음이 난무하는 참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보로디노 전투는 러시아군의 승리로 기록되지만, 톨스토이는 이 전투의 무의미함을 피에르의 눈을 통해 강조한다. 수많은 병사들이 두려움 속에서 죽어가는 동안, 정작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저 멀리 안전한 곳에서 상황을 관망할 뿐이다. "이것이 승리라면, 패배는  무엇인가?" 피에르의 이 씁쓸한 독백은 전쟁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폴레옹 역시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처럼 영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지만, 오만함에 사로잡혀 결국 몰락의 길을 걷는다. 모스크바 화재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 선 개인의 무력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이 변했다. 피에르는 나타샤와 가정을 이루고, 몰락 위기의 로스토프 가문은 니콜라이와 마리야 볼콘스카야의 결혼으로 안정을 되찾는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진정한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에필로그에서 보여지듯,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간의 삶은 여전히 고민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역사에서 '평화'란 잠시 머물다 가는 신기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과 평화』를 덮고 나면, 마치 한 시대의 흥망성쇠를 직접 경험한 듯한 긴 여운이 남는다.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개인의 선택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일까? 톨스토이는 방황하고, 성장하고, 때로는 좌절하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남긴다. 피에르가 포로 생활 중 깨달은 "순간에 충실한 삶", 안드레이가 죽음 직전에 느낀 초월적인 평화, 그리고 나타샤가 보여준 삶에 대한 강한 의지. 이 모든 것들이 모여, 결국 우리가 붙잡아야 할 삶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전쟁과 평화』는 단순한 역사 소설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거대한 서사시와 같다. 이 작품은 내 삶의 잔잔한 수면에 묵직한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그 돌멩이가 만들어낸 파문은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내 안에서 일렁였다. 피에르의 방황, 안드레이의 깨달음, 나타샤의 성장은 마치 내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다가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강렬한 울림은 앞으로도 내 삶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전쟁과 평화』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고전으로 남아 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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