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dbTlla님의 서재

Yunchan Lim 임윤찬 plays Chopin - 12 Études op. 25


그의 쇼팽 연주는 단순한 기교의 과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화 같았다. 15세 소년의 손끝에서 쇼팽의 에튀드 Op. 25의 음들이 영롱하게 빛났을 때, 나는 마치 음악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는 듯한 초월적 경험을 했다. 격정적인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던 '겨울바람'의 강렬함과, 나비의 날갯짓처럼 섬세한 Op. 25-9의 경쾌함이 서로 다른 세계의 대조적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객석의 공기는 찰나의 정적과 폭발하는 환호의 순간을 반복했고, 나는 쇼팽의 음들이 소년의 손끝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임윤찬의 연주는 단순히 쇼팽의 음악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그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조성진의 해석이 스쳐지나갔지만, 이내 그가 만들어내는 불꽃 같은 손놀림과 폭포수처럼 몰아치는 패시지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의 연주는 섬세하면서도 대담했다. 특히,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티시모로 치닫는 순간은 절대 예상할 수 없는 드라마였다. 그의 연주는 매 순간 예측할 수 없는 긴장을 유지했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몰입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파리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지켜보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뢰 같은 포르티시모와 속삭이듯 아득한 피아니시모가 교차할 때마다 청중은 숨을 멈췄다. 단순한 음악 감상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감하는 하나의 서사였다.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의 지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공연이었다. 큰 키와 긴 팔로 공기를 가르며 그려내는 유려한 동작들은 한 폭의 그림 같았고, 그 힘 있는 제스처는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임윤찬의 음악은 단순히 아름다운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을 울리는 힘을 지닌 예술이다. 쇼팽의 음악을 연주할 때도,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을 연주할 때도, 차이코프스키의 독주곡을 연주할 때도, 그의 음악에는 단순한 테크닉을 넘어서는 고통과 슬픔, 회복과 구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것이 영혼의 대화처럼 느껴졌던 이유일 것이다. 그의 연주는 나로 하여금 삶의 고통과 슬픔을 잠시 잊게 했고, 순수한 아름다움에 몰입하게 하는 초월적 경험을 선사했다. 나는 그의 음악을 통해 고통의 세계 너머에 있는 순수한 아름다움의 세계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다.


그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어, 그의 연주 일정을 찾아보니 캘리포니아의 여러 도시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코스타 메사, 샌디에고, 샌프란시스코, 라 호야... 마치 캘리포니아가 나를 임윤찬의 음악 여행으로 초대하는 듯했다. 지역적으 가까운 곳에서 네 번이나 그의 연주를 만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다. 이 네 번의 여정이 내 삶에 어떤 의미로 남을지 알 수 없지만, 그 시간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그의 음악을 따라 걷는 이 여정 자체가 예술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2월이 기다려진다.


임윤찬이라는 이름은 앞으로도 음악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는 이미 한국을 넘어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섰고, 그의 연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나는 그의 음악 여정을 묵묵히 응원하며, 언젠가 그의 연주를 통해 또 다른 차원의 경이를 마주하길 기대한다. 그의 음악이 나처럼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던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NPR의 Tiny Desk Concert에서 그의 연주를 보며 또 다른 매력에 사로잡혔다. 진지한 표정과 성실한 답변에 자연스레 마음이 기울었다. 이틀 전에 감기에 걸려 목이 아프다고 하면서도, 연주할 곡들을 차분히 소개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여러분도 즐겁게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덧붙이며 미소 지을 때의 담백함과 진솔함은 그의 연주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October를 소개하며 "이 곡이 청취자들의 마음과 영혼에 가득 차길 바란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이 단순한 멘트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발음이 유창하거나 표현이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바로 그 꾸밈없음이 그를 더 특별하게 만들었다.


웅장한 콘서트홀의 폭발적인 에너지와는 달리, 이 영상에서 듣고 보는 그의 연주는 숨겨진 보석을 발견한 듯한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법 같은 선율에 흠뻑 빠져든다. 햇살과 바람, 비와 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처럼, 그의 연주는 들을 때마다 전혀 다른 빛깔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그것은, 매 순간 그의 영혼과 호흡하며 살아 숨 쉬는 음악이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수술 날짜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곧 평온을 되찾았다. 회복 기간 동안 나의 친구가 되어줄 음악을 이미 선택했기 때문이다. 임윤찬의 앨범들이다. 그의 음악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법의 책과도 같다. 따뜻한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에 누워 그의 연주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영혼 깊은 곳까지 부드러운 빛이 스며드는 듯한 위로가 전해진다. 


여기서 연주하는 곡들은 Franz Liszt: Sonetto del Petrarca No. 104, Tchaikovsky: Moment lyrique, 그리고 Tchaikovsky: “October” (from The Seasons)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