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이란 이름―무죄이자 유죄인
그걸 뭐라고 부르지? 한편으로는 결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죄인.
-장 뤽 고다르, 카르멘이란 이름(Prenom Carmen, 1983)
‘카르멘’이라는 이름은 낯익었으나 ‘메리메’라는 이름은 낯설었다.
내가 ‘카르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인가 6학년 때의 일로, 음악선생님이 비제의 오페라를 언급했을 때였는데 그가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다만, 아마도 외국 유학을 다녀왔을 가능성이 농후한 그 남자 선생님의 ‘카르멘’이라는 발음만이 지금까지도 뇌리 속에 생생하고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ㅋ’과 ‘ㄲ’ 사이 어딘가에 놓인 첫 음소로 시작해 ‘르’로 슬그머니 미끄러졌다가는 ‘멘’ 하고 짧게 끊어지는 그 낯설고도 관능적인 소리에 나는 묘한 매혹을 느꼈다. 나는 끊임없이 자라났고, 언젠가의 그 음악 시간은 잊혀졌으며 더 이상 누구도 내게 음악 따위를 가르치지 않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는 생물학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소녀’가 아닌 ‘여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내가 ‘여자’라는 의식을 갖게 된 후로부터 나는 매혹적이고 관능적인, 어쩌면 치명적이기까지 한 마성을 지닌 여성들을 흠모하게 되었고, 가능하다면 나도 그러한 여성에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카르멘≫이라는 책을 만났을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면 그 이유는 바로 내가 빠져들거나 열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여성을 곧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내가 실제로 마주친 것은 ‘카르멘’이라는 여인이 아니라 ‘메리메’라는 작가였다.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카르멘을 실제로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은 2부의 외양 묘사 몇 구절에서밖에 없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호세라는 사랑에 미친 남성이 들려주는, 일종의 일화들 속에 간접적으로 드러난 그녀의 모습을,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그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카르멘이라는 인물을 ‘만난’ 것이 아니라 장막에 비친 카르멘의 그림자를 ‘엿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메리메라는 작가가 택한 서술방식의 효과였다면, 이 작가는 꽤 영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매혹적이거나 관능적으로 다가오는, 아슬아슬 위태롭게 춤추며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은 모두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 무엇’이다. 낯설고, 예상을 빗나가는,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어떤 단정적인 표현에서도 빠져나가며,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여기에는 바라보는 시선―주체와 대상―이 전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 매혹과 관능은 대상 자체에 내제된 속성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을 포착/파악/소유하려는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는 대상 사이에서 비롯된 셈이다. 그러므로 카르멘이라는 팜파탈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3자 혹은 관찰자의 눈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메리메는 1부에서는 (작가 자신을 투영한 듯) 고고학자인 화자를 등장시켜 나바로라는 도적을 만나게 하고, 2부에서 스치듯 베인 상처처럼 짧고도 강렬했던 카르멘과의 만남을 서술한 뒤, 호세 나바로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카르멘과의 일들을 옮겨 적는다. 이러한 구성은 ‘고고학자인 화자(나)’에서 ‘카르멘’으로 바로 직행하지 않고 ‘호세 나바로’라는 사랑에 빠진 인물을 경유해 가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는 처음에는 화자인 고고학자를 따라, 다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 호세 나바로의 이야기를 따라 카르멘이라는 잡히지 않는 야생동물을 추적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전개에서 오는 서스펜스와 함께 카르멘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매혹을 체험한다. 작중화자가 제3의 인물(호세 나바로)을 묘사하고, 그 제3의 인물이 카르멘이라는 주인공을 형상화하는 2중의 구조를 택한 덕분에 작가는 이야기의 긴장과 캐릭터 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카르멘의 이야기’가 아니라 ‘카르멘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장막에 비친 그림자로 제시된 카르멘의 말과 행동을 볼 수 있을 뿐, 그리고 그 말에 숨은 의미나 행동의 동기를 유추할 뿐, 진짜 사건의 전말이나 카르멘 자신의 내면을 읽을 수는 없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카르멘이라는 매혹적인 집시 여인이 아니라, 집시 여인이라는 매혹적인 타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우리가 취하는 태도,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 소설이 들려주는 호세 나바로와 카르멘의 사랑이야기(?)는 주체와 객체, 남자와 여자, 문명과 비문명, 선진국과 후진국, 중심과 바깥의 관계 등에 대한 은유로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호세가 끝내 카르멘을 살해하고 말았다는 대목은 곱씹어보면 무척 섬뜩하다. 타자를 파악하려 하고, 통제하려 하고, 우리의 질서에 편입시키려 하다가 실패할 때 우리가 취하는 마지막 행동이 그 타자를 제거해버리는 것이라니.
카르멘은 그저 한 인간이었다. 장막에 비친 그림자, 그러니까 호세 나바로라는 필터를 통해 그려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한 여성으로서 나는 그녀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뜨거운 인간이자, 세상의 몰이해와 핍박에 위악으로 맞섰고, 자신이 속한 민족과 문화 안에서 죽는 순간까지 당당했던 그녀의 삶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