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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천천히 가볍게 오랫동안

어제 밤, 막내의 교복 블라우스 2장, 하는 김에 큰딸의 셔츠 3장까지 다림질을 했다. 다림질을 끝내고 주방 씽크대 위에 어질러진 것들을 정리하는 동안 카푸치노를 잊고 있었다. 저녁으로 소고기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산 카푸치노는 거실 테이블 위에서 차갑게 식어버렸다. 난 식어버린 커피도 잘 마시므로 별로 개의치 않았다. 


거실에 앉아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카푸치노를 마셨다. 식은 커피도 잘 마시지만 식어서 다 내려앉은 카푸치노의 거품은 좀 볼썽 사나웠다. 12시가 넘었고, 월요일엔 아들이 6시 반에 일어나 나가야 하므로 나도 일찍 자려고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눈이 말똥말똥, 정신이 생생했다.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일어나 앉았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데, 책이나 더 읽자. 


2시를 넘어가도 좀처럼 잠이 찾아오지 않았다. 밤늦은 시간에 마신 카푸치노 탓일까. 예전엔 하루 중 어느 시간에 커피를 마시든 잠을 자고 못자고는 상관이 없었는데, 나의 수면과 각성은 카페인과 무관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게 안되나보다. 몸이 카페인에게 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새벽 3시쯤엔 시집, 김사인 시인의 <가만히 좋아하는>을 펼쳤다. 봄밤이니까 '봄밤'을 읽고 자야지. 시 '봄밤'을 펼쳐 읽었다. 그런데 어, 내가 왜 이러지. 웃는데 눈물이 나는 건 뭐야. 처음 읽는 시도 아닌데, 뭐 이런 경우가...


 

추적추적한 봄밤에 이런 시는 너무 따뜻하고 정겹다. 술 한 잔 마시고 불콰해진 낯으로 고단한 삶 따위 뭐 대단키나 하냐는 듯이, 끌어당기는 소매 뒤로 쓸쓸함을 감추고 호기를 부리는 봄밤. 그 투박하고 서글픈 정서가 진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까지도 저녁에 먹은 소고기는 오랜 시골마을 터줏대감 어르신처럼 내 뱃속에 근엄하게 좌정하고 있었고, 내 위는 엄한 할아버지 앞에 무릎꿇고 앉아 불편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 같았다. 카페인은 오래도록 막강하게 각성의 힘을 유지하고 있었고 내 마음은 시 하나에 무너져 어두컴컴한 거실 스탠드 조명 아래서 주책맞게 눈물이나 찔끔대고 있었으니... 참으로 길고 힘든 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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