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내게 시는 ‘재앙’이라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입니다. 내게 오로지 나의 존재 증명이자 여자로서, 서녀로서, 소실로서 살아야 했던 내 생의 전부를 내건 발언이고 항변이고 싸움이었던 거지요.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이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그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임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지요.
p.278
삶의 이러저러한 곤궁함으로 인해 옥봉을 맘껏 만나기가 수월치는 않았다. 그런데도 지친 밤 옥봉의 삶을 끌어안고 침잠해 가기를 여러 날이 지났다. 아니, 어쩌면 너무도 유약한 나는 옥봉의 치열하고 비참하고 서글픈 삶을 바라보는 일이 아프고 아파서 옥봉을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나와 너무도 닮은 그 시대의 여성이 지워진 시대를 참혹하게 살다 간 옥봉의 삶이 내 삶을 관통하며 명치에 아릿한 통증을 느끼기도 수차례.
14년 전, 이혼녀 딱지를 달고 가부장적 남성 권력에 휘말리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을 때, 모두가 나쁜 여자, 나쁜 엄마라고 손가락질해댔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사는 삶을,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서, 더는 아프기 싫어서 숱한 상처와 오욕을 치유하기 위해 글을 써대고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애당초 생에 만약, 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너도, 나도, 아무도 생의 뒷모습을 모르는 것 아닌가. 너와 나의 생이 그런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굴레에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 살아가는 것, 그게 생인 것이다.
p.307
난 여전히 문학이 뭔지 시가 뭔지 모른다. 문학을 배운 적도 시를 배우려고 애를 쓴 적도 없다. 내가 감히 글을 쓰며 살게 되리라고는 정말 몰랐다. 나에게 주어진 굴레에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 살아가는 것, 어찌어찌하다 보니 이 길 위에 서 있을 뿐, 이게 생이 아니던가.
그저 어느 날부터인가 홀로 떠드는 내밀한 일기가 수필이 되고 수필이 어느새 시가 되어 세상 모든 아픔을 씻기는 빗방울처럼 내렸다. 아프지 않기 위해 썼던 수많은 밤 들이 내 가슴에 오롯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놀랍게도 그 시들이 노래가 되어 다시 내게로 왔다. 물론 옥봉처럼 모두를 놀라게 하는 시를 쓰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육신은 죽고 나는 시절 속에 살아남았다.
서녀로서 소실로서 살아가다 끝끝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할지라도 그녀의 시는 불온한 세상에 맞서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며 생의 모든 것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오래도록 깊은 슬픔에 젖어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참혹했던 그 시절에 오롯이 ‘시’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한 여인을.
*가을, 가을 향기가 그윽할 때 옥봉의 삶과 조우하기를 . . .
#백만년만에쓰는책감상평
#옥봉 #장정희장편소설
#도서출판강
애당초 생에 만약, 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너도, 나도, 아무도 생의 뒷모습을 모르는 것 아닌가. 너와 나의 생이 그런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굴레에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 살아가는 것, 그게 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