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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어 반짝이는

본래 서 있던 장소로 돌아온 그는 아래쪽을 보았다. 눈이 절로 커졌다. 진영에 변화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산성도 비원도 선제공격을 거부하고 있었다. 단지 혹여나 상대편 파쇄자가 공격을 시작할까 두려워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뿐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평형상태가 유지된 적은 없었다. 최근의 비원은 자리에 말뚝처럼 박힌 채 미동도 않았고, 산성은 그것을 온건한 압박으로 간주해 결국엔 공격하곤 했다. 그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친구들로부터 이리도 멀리 떨어진 곳에 홀로 높이 서 있는 건 비원과 산성의 복잡한 움직임을 한눈에 보기 위함이었다. 그는 4년만에 처음으로 그 전략에 의문을 품었다. 지난 몇 달간, 그러니까 비원의 수장이 바뀐 이후로, 자신이 꼭 이런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봐야만 하는 상황이 있었던가?- P399
홀로 높은 곳에 서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서둘러 산성이 진을 친 곳으로 내려갔다. 근처엔 총을 들고 쫓아오는 서형우도 없고 우아하게 고개를 쳐든 최주상도 없었지만, 그의 발은 어느 때보다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언덕을 구르듯 뛸 때 윤서리는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흘끗거리고 있었다. 정여준이 숨을 거뒀던 시간이 지났다. 그녀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경선산성에 뛰어가 사람들에게 정여준을 찾아보라고 외치고 싶었다.- P408
윤서리는 시계를 감싸 쥐고 손을 내렸다. 몇십 년에 걸쳐 거짓말만 하느라 이젠 얼굴에 진심을 드러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지적을 받고도 포커페이스로 돌아가기 힘겨웠다.
무료하게 떠돌던 김현이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산성 사람들이 양옆으로 천천히 갈라지고 있었다.
김현이가 최주상에게 말했다.
"둘로 나뉘네. 자넨 왜라고 생각해? 난 숨어 있던 나머지 인원이 뒤에서 합류하려는 것 같은데."
"공격을 시작하려는 거겠지. 오늘은 지난번보다 많이 늦긴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될 일이었잖아."- P400
둘의 목소리는 윤서리의 정신에 닿지 않았다. 그녀는 반으로 나뉘는 산성 진영 한가운데를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조금 당황한 듯. 그러나 거부감 없이 선선히 몸을 뺐고 가장 앞을 지키고 있던 이찬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뒤를 보지 않아도. 무엇이 다가오는지 아는 것처럼.
한 남자가 무리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앞으로 나섰다. 정여준이었다.
피 흘리는 반시체가 아닌, 생생히 살아있는 정여준이었다.
"어라." 김현이가 휘파람을 불었다. "웬일이래."
"...됐어."- P401
윤서리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살아있는 이들과 고요한 도시를 느리게 둘러보았다. 되돌려지지 않고 세차게 흘러가는 시간이 어색하고 감격스러웠다. 그녀는 손목을 두른 익숙지 않은 시곗줄을 풀었다. 시계 알을 들여다볼 일이 더는 없었기에 그녀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바닥에 내던졌다. 이제 그것은 누군가의 초조와 절박함을 빨아먹을 일 없이, 아침 참새의 장난감이 되어 새둥지 정도나 장식할 것이었다.
윤서리가 저를 무슨 심정으로 쳐다보는지 정여준이 알 도리는 없었다. 정여준은 자신의 무리를 시선으로 다독이면서 이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찬은 퉁명스럽지만 불만 없이 말했다.
"굳이 네가 안 나섰어도 별문제 없었을 거야."- P401
그는 그대로 비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홀로 
다가오는 그를보며 비원이 술렁였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윤서리와 정여준조차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윤서리는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영원히 시간을 돌려도 바꿀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한 사람의 운명이, 장고의 인내 끝에 드디어 변화를 받아들였다.
"비원!" 윤서리가 소리쳤다. "지금까지 싸웠던 시간보다 더 오래 대화를 나눌 것이다! 내가 용서받고 돌아올 때까지 죽지 말고 여기 있어라!"
사망의 낙인을 떨쳐낸 정여준을 보며 그녀는 심호흡했다. 울고싶지 않아서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눈송이가 콧잔등에 내려앉아 햇살처럼 녹아내렸다.
그녀는 가슴을 쭉 펴고 걸음을 디뎠다. 정여준의 유언이었던 마지막 말을, 그러나 이제는 유언이 아닌 한 문장을, 그녀는 승리감에가득 차 그에게 소리쳤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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