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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어 반짝이는
<그 시절의 연인들>
1978년 단편집으로 출간되었다.
1960년대... 현실의 벽에 막히고 결국 순응하며 이루어질 수 없었던 노먼과 마리의 사랑의 순간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나는 잠들지 못한 채 누워서 당신 생각을 해요."  마리가 속삭였다.
"나는 당신 때문에 살아." 노먼도 속삭이며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아, 정말이에요. 나는 당신 때문에 살아요. 마리는 말을 마저 끝내지 못한 채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차에 서둘러 올라탔다. 노먼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그녀의 커다란 빨간색 핸드백이었다. 둘이 다시 만나려면 열여덟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P450
... ... ‘목욕탕‘이라는 표지판을 발견한 노먼은 그레이트 웨스턴 로열 호텔의 목욕탕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안을 들여다보았다.
"맙소사!" 그는 이렇게 속삭이면서 1960년대를 특별한 10년으로 만들게 될 멋진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그날 이후로 그는, 2층 목욕탕을 처음 들여다보던 순간을 기억할 때마다 그 당시에 경험한 기쁨의 전율을 매번 다시 맛보았다. - P452
그들이 힐다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경제적인 문제였다. 그는트래블와이드에서든 아니면 다른 어디에서든 큰돈을 벌 가망이 없었다. 힐다를 잘 아는 노먼은 이혼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녀가 최대한 많은 이혼 수당을 요구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혼을 한다면 법에 정해진 대로 힐다에게 이혼 수당을 지급해야 했다. 힐다는 장신구를 만들어 봤자 푼돈을 벌 뿐인데 그 일도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 이유로 해가 갈수록 동상에 쉽게 걸린다거나 관절염 증세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고 말할 테고, 그것도 아니면 생각나는 대로 아무 핑계나 둘러댈 것이 틀림없었다. 힐다는 자기를 버린 그를, 길든 동반자 없이 살게 만든 그를 증오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이를 갖지 못하는 억울함에 그의 외도를 물고 늘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근거없는 인과 관계를 찾아낼 테고, 비통함의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것이 분명했다.- P454
노먼과 마리는 1월 1일 점심시간에 호텔 목욕탕으로 갔다. 그는 둘이 제대로 만난 지 1년이 되는 날을 기념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노먼은 화끈한 여자일 거라고 믿었던 그녀의 첫인상을 떨쳐 버린 지 오래였다. 마리는 육감적으로 보였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겉모습 속에 숨은 그녀는 고지식하기 그지없었다. 바싹 마른 데다 관능적인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힐다 역시 외모와는 딴판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마리는 목욕탕에서 이렇게 고백했고, 노먼은 이런 그녀가 더욱 사랑스러웠다. 그는 이 문제를 대하는 그녀의 단순함이,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키려는 그녀의 바람이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마리가 다른 그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다고 수없이 맹세한 만큼 둘의 첫날밤을 앞당긴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 맙소사. 사랑해요" 마리는 목욕탕에서 처음으로 맨몸을 드러낸 채 속삭였다. "당신은 정말 다정해요."- P457
그날 이후로 목욕탕에서의 밀회는 예사로운 일이 되었다. 노먼은 호텔 바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와 드넓은 1층 라운지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2층으로 올라갔다. 5분 후에 마리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가방 속에는 집에서 챙겨 온 수건이 들어 있었다. 
목욕탕에서 노먼과 마리는 늘 속삭이며 말했고, 
사랑을 나눈 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앉아 물속에서 손을 잡은 채 미래에 대해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문을 두드리며 안에서 무엇을 하는 거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먼과 마리가 따로 호텔 바로 돌아올 때에도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둘이 함께 사용한 수건은마리의 가방 속에서 콤팩트와 손수건을 눅눅하게 만들었다. 
한 달 두 달 지나가던 시간은 이제 1년 2년 단위로 흘러갔다. 
노먼 브릿과 마리는 둘이 같이 싫어하는 모든 생각을 목욕탕 안에서만큼은 잊어버렸다. 그들이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목욕탕을 지배하는 것은 사랑의 기운이었으며 사랑은 육체적으로 가까워지고자 하는 그들의 열정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노먼과 마리는 그렇게 믿었다. 사랑은 정도를 벗어난 그들의 행위를 용서해 주었다. 그들은 오직 사랑 때문에 호텔 직원들의 눈을 속였고 이런 행동을 할 용기를 얻었다. 노먼과 마리는 사랑이 모든 것을 용서해 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P459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노먼은 고객들에게 티켓을 팔거나 마리를 저녁 기차에 태우다가도 문득 우울해졌다. 시간이 더 많이 흐르면서 노먼을 사로잡은 우울함은 더욱 강렬해졌다. "당신이 곁에 없을 때 난 너무 슬퍼." 어느 날 노먼이 목욕탕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더 이상은 못 견딜 것 같아." 마리는 집에서 그녀의 커다란 빨간색 가방에 담아온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았다. "부인한테 말해야 돼요." 마리는 전에 없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무 늦게 아이를 낳는 건 싫어요." 그녀는 더 이상 스물여덟 살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서른한 살이었다. "이건 나한테 공평하지 못해요."

노먼은 지금처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마리에게 공평한 일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459
... ... 어느 날 밤, 힐다가 클럽에 간 사이에 노먼은 옷가지를 챙겨서 마리와 함께 킬번에 구해 둔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로 갔다. 그는 힐다에게 어디로 가는지 말하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쪽지 한 장만을 남겨 두었다.
노먼과 마리는 킬번에서 남편과 아내로 살아갔다. 그들은 화장실과 목욕탕을 열다섯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용해야 했다. 이윽고 노먼 앞으로 법정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이 도착했다. 법정에 출두한 노먼은 그가 아내에게 비겁하고 비열하게 행동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힐다에게 규칙적으로 생활비를 보내겠다고 동의했다.- P465
노먼이 모든 일이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인다고 이야기할 때면 마리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맞섰다. 1년 전쯤과 달리 마리는 더 이상 비탄에 빠져 있지만은 않았다. 그녀 역시 중압감에, 특히 리딩 집에서 그녀를 짓누르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노먼은 결국 우리가 졌다고 말했고 마리는 울었다. 노먼 역시 잠시 눈물을 흘렸다. 그는 트래블와이드에 다른 지점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했고 그레이트 웨스턴 로열호텔에서 멀리 떨어진 일링으로 발령되었다.- P467
18개월 뒤 마리는 맥주 공장에서 일하는 남자와 결혼했다. 노먼이 혼자 지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힐다는 그에게 지난 일은 잊어버리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일링 집의 거실에 외롭게 앉아 있던 노먼은 힐다의 생각에 동의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악감정은 갖지 말기로 해요." 힐다가 말했다. "서로를 속이지도 말고요. 클럽에서 만난 그 남자 있잖아요, 울워스 매장 관리자 말이에요. 그동안 그 사람이 여기서 지냈어요." 노먼은 악감정을 갖지 않기로 동의했다.
1960년대는 지나갔지만 그 떠난 자리에는 마리와 나눈 사랑의 경이로움이 남았다. 그가 마리와의 관계를 털어놓았을 때 힐다가 드러낸 멸시도, 킬번의 방 두 개짜리 더러운 아파트도, 전혀 즐겁지 못했던 리딩에서의 생활도 마리와의 사랑이 선물한 경이로움을 퇴색시키지 못했다.- P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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