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제로 일한 첫날부터 기운이 하나도 없고
나중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도제 계약이 끝날 때까지 매형에게 그런 느낌을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일 뿐이다. 당시를 돌이켜보면내 가 나를 다행스럽게 여길 수 있는 건 그것 하나밖에 없다.- P167
이야기를 계속하다보면 나오겠지만,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모두 매형 덕분이다. 몰래 도망가서
군인이나 뱃사람이 안 된 건 내가 충실해서가 아니라 매형이 충실해서다. 내가 불만을 꾹 참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일한 건 내가 성실해서가 아니라 매형이 성실해서다. 상냥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할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옆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내가 도제로 일할 때 좋은 점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만족하며 순박하게사는 매형 때문이지, 불만이 가득한 채 다른 생활을 끊임없이 갈망하는 나 때문이 아니다.- P168
당시에 내가 원한 게 무언지 지금 이 순간에 누가 알겠는가? 당시에 하나도 모르던 내가 인제 와서 무얼 알겠는가? 당시에 끔찍하게 두려워하던 건 내가 유별나게 더럽고 천박한 모습으로 일하다가 눈을 문뜩 뜨니 대장간 나무 유리창 한곳에서 바라보는 에스텔라가 보이는아주 불행한 순간이었다. 까만 얼굴에 까만 손으로 아주 거칠게 작업하는 모습을 결국엔 에스텔라가 발견하고 의기양양하게 깔볼 거라는 두려움에 나는 끊임없이 시달렸다.- P168
"비디, 나는 신사가 되고 싶어."
그러자 비디가 대답했다.
"아, 내가 너라면 그러고 싶지 않을 거야. 그런다고 행복한 건 아니거든."
"비디, 나는 신사가 되고 싶은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
내가 아주 엄숙하게 말하자, 비디가 물었다.
"네가 잘 알겠지. 핍. 하지만 지금 현재가 훨씬 행복하지 않니?"
"비디, 나는 지금 현재가 조금도 행복하지 않아. 내가 하는 일도 지겹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지겨워. 도제계약을 맺은 이후로 어느하나 마음에 안 든다고 엉뚱한 소리 그만해."
- P199
"내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면, 마음을 다잡아서 어릴 때 절반만큼만 대장간을 좋아할 수 있다면, 나에게 훨씬 바람직하겠지. 그러면 너랑 나랑 매형도 더는 바랄 게 없겠지. 도제 수련을 마치면 매형하고 동업할 수도 있고, 어른이 되면 너와 사귈 수도 있고, 서로 완전히 다른 관계를 맺고서 이렇게 화창한 일요일이면 바로 여기 강둑에 나란히 앉을 수도 있겠지. 그러면 나는 너에게 아주 잘할 거야, 그치, 비디?"- P200
비디가 가만히 있다가 차분하게 물었다.
"신사가 되고 싶은 건 아가씨에게 앙갚음하고 싶어서니, 아가씨에게 사랑받고 싶어서니?"
"나도 모르겠어." 내가 우울한 어투로 대답하자, 비디가 다시
말했다.
"그러고 싶은 이유가 아가씨한테 앙갚음하는 거라면 내 생각엔 --물론 네가 훨씬 잘 알겠지만 그 말에 조금도 신경을 안 쓰는 게 훨씬 의연하고 좋은 방법 같아. 그리고 아가씨 사랑을 얻는 거라면,
내 생각엔 - 물론 네가 훨씬 잘 알겠지만 그런 아가씨에게는 사랑을 얻을 가치가 없는 것 같아."
- P201
"우리 약간 더 걸을까, 아니면 집으로 갈까?"
나는 약간 더 걷자고 하고 우리는 그렇게 하는데, 여름날 오후가 여름날 초저녁으로 조용히 가라앉으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했다.
이런 환경에서 사는 편이 시계가 멈춘 방에서 촛불에 의존하고 ‘이웃거지 만들기‘ 카드놀이를 하며 에스텔라에게 경멸당하는 편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고 건강하단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머리에서 에스텔라 생각을 몰아낼 수만 있다면, 저택에 대한 기억과 환상을 모두 몰아낼수만 있다면, 내가 현재를 즐겁게 받아들이면서 일할 수만 있다면,
그 일에 몰두하며 보람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나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을거란 생각도 들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비디가 아니라 에스텔라라면 나는 훨씬 비참한 심정일 거란 사실을 내가 확실히 모르는지도 마음속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걸 확실히 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너는 정말 어리석은 놈이야, 핍!" 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속에서 저절로 나왔다.- P203
재거스 변호사가 다시 말하더니, 무언가를 용서하겠다는 듯, 두눈을 감고 매형에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젊은이에 대한 말을 하겠소. 내가 전할 말은 젊은이가 상당한 유산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오."
매형과 나는 숨을 훅 들이켜며 서로를 쳐다보고 재거스 변호사는 손가락을 옆으로 뻗어서 나를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본인은 상당한 유산을 받게 될 거란 사실을
젊은이에게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소. 게다가, 재산을 현재 소유한 의뢰인은 젊은이가 현재의 생활반경에서, 바로 이곳에서 지금 당장 벗어나 신사다운, 한 마디로 상당한 유산을 받을 젊은이다운 교육을 받길 원한다는 사실 역시 전달하라는 지시도 받았소."
마침내 꿈이 실현되었다. 하비셤 아씨가 상당한 재산을 넘겨줄 거란 엉뚱한 환상ㅈ이 현실로 확실하게 나타난 것이다.- P215
"자, 핍 군, 이제부터 하는 말은 모두 자네에게 하는 말이네. 자네가 명심할 건, 첫째, 나에게 이런 일을 맡긴 의뢰인은 자네가 핍이란 이름을 끝까지 사용하길 요구한다는 사실이네. 상당한 유산을 남기는 조건치곤 내용이 아주 간단하니, 자네 역시 이의는 없을 거라고 나는 장담하네. 하지만 이의가 있다면 지금 말하도록 하게."
ㅈ나는 심장이 너무 빠르게 쿵쾅거리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너무 심하게 일어난 나머지, 이의가 없다는 말을 더듬더듬 간신히 뱉어냈다.
"나도 없을 거로 생각했네! 자네가 명심할 건, 둘째, 핍 군, 자네에게 크나큰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자신이 직접 밝힐 때까지 이름을 완벽한 비밀로 삼길 원한다는 사실이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의뢰인이 자신 입으로 이름을 직접 말하고 싶어서 그런다는 정도네. 언제 어디에서 그럴지는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네. 앞으로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일 거야. 그러니 자네는 앞으로 나와 대화하는 가운데 그사람이 누군지 곰곰이 생각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이름을 암시하거나 언급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명심해야 하네. 머리에 뭔가 짚이는 게 있어도 그냥 머릿속으로 묻어두게. 이런 걸 금지하는 이유는 원래 목적과 아무런 관계가 없네. 무엇보다 중요하고 엄중한 이유일 수도 있고 단순한 변덕일 수도 있네. 이것 역시 자네가 파고들 문제는 아니야.- P216
곧이어, 매형은 바로 밑 문가에서 파이프를 태우고 비디도 옆에 함께 서서 차분한 대화를 나누는데, 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이 다정한 어투로 내 이름을 언급하는 게 한 번 이상씩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리가 제대로 안 들리기도 하는 데다 더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창가를 물러나 침대 옆에 하나뿐인 의자에 앉았다. 놀라운 행운이 찾아온 첫날 밤에 알 수 없는 외로움이 너무나 슬프게 몰려들었다.
그렇게 외로운 건 생전 처음이었다.-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