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책이 있어 반짝이는
<이아생트의 정원> 뱀과 별

신부님이 말을 이었다.
"물론 어려움도 있겠지요.항상 그렇듯이 말입니다...... 이번 상황은 더 특이하긴 하지요." 그분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당신 말에 힘을 보태길 바란다는 걸 깨달았다. 난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을 뿐이나 그분은 안심이 된 듯했다. 다시 말을 이었다.
"아이는 이해도 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합니다. 가고 오고먹고 마시고 자고, 여러분이나 나, 누구나처럼..
그런데 어쩌다 대답을 해도 건성으로..
말은 거의 안 해요.……………비껴 겉돈달까 기계적이랄까요………… 익숙해져야겠지요, 아이가 무감각해 보이긴 해도 인내심과 우정으로 해결할 문제아닐까요."- P172
그분이 여자아이를 향해 중얼거렸다.
"펠리시엔."
이름을 듣더니 그 아이는 고개를 들어 눈길을 보냈는데, 정작 무얼 보는지는 모를 그런 눈길이었다. 무얼 응시하는게 아니었고 그냥 허공을 향하듯, 아니 어딘가를 향한 것도아닌 듯 눈을 크게 떴을 뿐이다. 얼굴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지만 순수함을 흐리는 얼뜬 표정은 아니었다. 이 부동의 얼굴은 다정함과 지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직은 갇혀 있는어떤 생각이 돌아오기를, 기억력이 서서히 가동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나 할까.
"자 그럼." 신부님은 나를 향해 말했다.
시도니가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P173
이 외진 곳에서 그나마 유일한 이 조무래기들과도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펠리시엔은 자연스러운 세상과 떨어져있었다. 아이는 우리에게만 의지했다. 그러니 어린 시절만이 줄 수 있는 호의를 누리지 못했다. 상상력과 감정과 누그러뜨릴 수 없는 사기가 엮어주고 잠시 유지하다가 이윽고 잠깐의 그 구조물을 허물곤 하는, 유년 공동체의 마법 같은 삶을 대신해줄 것은 세상에 없다. 아이는 활발함을 잃은자신의 상태에 걸맞지 않은, 발랄한 유희의 왁자함을 두려워하는 듯했다. 실제로 (몰입하노라면 미친 짓도 불사하게 되는) 유희를 즐기려면 자신을 잊어야 하는데, 기억력을 거의다 상실한 마당에 어찌 또 자신을 잊을 수 있겠는가? 펠리시엔에겐 추억이 없었다. 추억들로 세워진 상상의 세계 속에서만 자신을 잊을 수 있는 법.- P187
우리는 이런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아이는 우리에게 의지한 채 자기를 사랑하는 시도니와 측은히 여기는 나 사이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 P187
영혼이 없는 자연과 소통하기에 다다른 우리 두 사람의 각별함은, 애초에 우리 집에 펠리시엔을 들이는 일을 퍽 수월하게 받아들이도록 했던 것 같다. 아이의 멍한 몸과 생각이 지워진 얼굴은 처음엔 우리를 당혹에 빠뜨렸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아이가 우리 삶의 방식에 적응해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이의 기이한 특성을 모르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것조차도 가끔 설명 불가해한 양상을 띤 삶의 
질서의한 부분이려니 여겼다. 게다가 우리는 아이를 사랑했다.
이런 애정에 굳이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불행한 운명이 불러일으킨 평범한 동정심이 아니었다. 그건 시도니에게는 열정적으로, 내게도 투박하나마 함께한 다정한 마음의 발로였다.- P235
나는 우묵한 몽상 속에,생명이 가장 활발한 
그 속에, 대지가 태초 선조들에게 제공했던, 아직 진흙으로 따스한 요람을 새삼 강하게 느꼈다. 그밤에 나는 대지에서 부드럽고 좋은 것만을 기대했으니, 나는 그녀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거기서 전해오는 모든 것이기쁨과 무한한 평화를 안겨주었다. 내게서 나온, 내 생각의창조물들과 상상의 존재들도 대지의 후의를 전해주었다. 어떤 무게 추 하나가 따스한 머리통처럼 오른쪽 어깨 위에 놓이면서, 정신에서 비롯한 존재들이 여전히 영혼의 존재이면서도 한층 물질화된 것 같다는 생각이 이따금 스쳤다. 그 존재는 나를 믿고 내게 기대어 잠을 청하러 왔었던 듯. 그래서 행여 깨울세라 걱정이 된 나는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P263
시도니가 일어나서 나를 발견한 것은 아침에 이르러서인데, 나는 여전히 어깨에 기대어 있는 한 여자아이와 함께 잠들어 있었다.
눈을 뜨자 아이가 내 앞에 움직임 없이 서서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P263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