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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주 내내 번잡하고 고생스런 집안 일에 치이다 몸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인지 아침 먹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책 읽으려고 앉았다가 나도 모르는 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언제부터 잠이 든 건지 시간을 알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렸는데 중간에 외출했다 돌아온 남편도 들어와 보고 아들도 문 한 번 열어보더니 나가고 다시 한참이 지난 듯한 느낌에 일어나 보니 5시가 넘었더라는... 대체 낮잠을 몇 시간을 잔 건지 알 수가 없네. 

목요일 장시간의 운전이 너무 힘에 부쳤었나 보다. 어제도 하루 종일 바빠 몸이 쉴 틈이 없었다.

이젠 나의 몸을 맹신하면 안된다. 멍한 정신으로 책을 읽으려니 통 정신 집중이 안된다. 그래서 천천히 시 몇 편을 읽었다.



창비에서 벌서 500권에 이르는 시집을 펴냈다. 그 중 몇 권을 읽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작가들의 시집이 출간됐다니 놀랍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총 77명의 시인들이 창비시선 전 시집에 수록된 시 가운데 가장 좋아하거나 즐겨 읽는 시편들을 추천해 주었고 이를 받아 중복되는 작품과 시인을 최소한으로 추려내고 최종 73 편의 작품이 이 한 권의 시집으로 엮었다. 시선집의 제목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은 신경림 시인의 『농무』(창비시선 1)의 수록작 「그 여름」의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시집은 총 4부로 구성이 되어있고 오늘은 며칠 전에 이어 제 1부와 2부의 시 몇 편을 읽었다. 시 한편을 읽었을 뿐인데 마치 단편 소설 한 작품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압축적인 시어의 힘 덕분일 것이다. 김언희 시인의 '4월의 키리에'와 전욱진 시인의 '미아리'를 읽고 특히 더 그랬다. 



4월의 키리에 


김언희



1

양가죽을 벗기듯이

벗기소서 우리의 가죽을


우리가 흘린 피 웅덩이 속에 우리를 오래 세워두소서

핏물이 눈알까지 차오르도록


갈고리에 우리 뒷덜미를 걸어두소서

흔들흔들 서서 잠들게 하소서


발끝으로 

서서

자게 하소서  


2

우리가 흘린 피로 우리의 내장을 채우소서

우리에게 먹이소서


우리에게 우리를 

먹이소서


우리가 낙태한 아기들이 우리에게 붉은 

태반을 먹이듯이


우리가 도살한 짐승들이 우리에게 

피순대를 먹이듯이


먹이소서 우리에게 우리를

한점 한점


끝까지

먹이소서



***



미아리


장욱진


언제부터 한쪽이 결린다던 누나는

얼마 안 가 해만 지면 몸져누웠다

이웃들도 의사들도 점집에나 보내보라 했지만

싫다고 싫다고 악을 썼는데

이번에는 내가 앓아눕자

누나는 조용히 내림굿을 받았다

누나가 늘 바라던 방이 그때 생겼다


차림이고 낯이고 전부 다 어두운

인간처의 낮에는 방울 소리 지나서

마음이 열리거나 닫히는 소리

닳도록 손 비비는 소리는 저녁상 치우면 들렸다

문득 잠에서 깨 오줌 누러 가는 한밤

초에 켠 불이 많아 아늑하게 깊숙하게

밝은 그 방으로 모르는 할머니가 들어갔고


일요일엔 모처럼 티셔츠를 입고 나와

누나는 시고 단 귤 먹고 싶다 했다

요앞 청과에 좀 다녀오라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키시면

나는 싫다고 싫다고 버팅기다 내쫓기듯

집을 나와 내리막길 걸으면 푸른청과 보이고

오르막길 걸으면 끝에 영광교회 나와서

낑낑 오르는 신자들 매번 저기 마귀 동생 간다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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