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한 장 넘겨가자, 작가의 차분하고 촘촘한 전개가 돋보였다. 빛나는 시구들과 삶을 성찰하는 에피소드들에 묻혀 흘러가다가 나도 모르게 거대한 페이소스를 만나게 된다!
주인공 정윤의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작품의 서두를 지배하고 있다. 상실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우정, 사랑, 우정, 사랑... 그러다가 윤교수의 크리스토프 이야기와 서양 시인들의 빛나는 시구가 나의 정서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시위로 점철된 암울한 시대의 비정상적인 권력에 소리 없이 실종되는 지식인들과 출구 없는 청춘의 초상. 소통 부재의 관계 맺음 속에서 윤, 명서, 단, 미루 이 네 젊음의 방황과 좌절을 그린 소설. 아니 소멸을 향해 다가가는 그들의 애잔함에 대해 그린 소설이었다.
중반을 지날수록 네 젊은이의 얽히고 설킨 인연이 딱히 맺어지지도 않지만, 가슴먹먹한 슬픔이 느껴진다. 사고사인지 자살인지 또는 의문사인지 모를 단이의 죽음과 옛 할머니 집에서 죽는 미루,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윤교수의 죽음을 보면 이 소설은 죽음과 소멸을 향하고 있다.
에로스적 본능이 아닌 타나토스적 본능이 강하게 느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이 작품의 최고의 미덕이다.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모든 요소가 퍼즐을 맞춘 듯이 하나로 밀려와 가슴이 미어진다. 커다란 슬픔과 애조의 파도가 밀려든다. 특히 윤교수가 제자들의 손바닥에 남긴 유언의 퍼즐조각이 맞춰졌을 때의 감동은 형언하기조차 힘들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
작가는 마지막까지 희망적 바람을 잊지 않는다. 명서의 갈색노트의 마지막 구절이 그것이다.언.젠.가.언.젠.가.는.정.윤.과.함.께.늙.고.싶.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감동은 시대와 불화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그들의 가장 빛나는 순간과 죽음이 야기하는 소멸과 애잔함이 합쳐지면서 서서히 밀려든다. 아릿한 가슴의 먹먹함을 통하여...
이런 애잔함을 주는, 직접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소설은 이 소설 말고는 아마 다시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