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하면 개잡주 냄새가 심하지만 대한민국의 두 번째 성장 동력은 제약일 가능성이 높다. 신약 개발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생산이다. 삼성이 바이오로직스를 시작한 건 수십 년 간 웨이퍼를 갈고닦아 만든 초미세공정 기술 덕분이다. 분자의 크기가 대충 0.1~1nm쯤 하니 트랜지스터를 3nm 간격으로 배치하는 삼성전자의 기술은 가히 분자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분자를 조립하는 일 중에 가장 가치가 높은 건 제약이니, 안 할 수가 없는 거지.
위고비와 마운자로는 제약의 경계를 넓혔다. 자기 관리의 실패로 여겨지던 비만은 이제 질병으로 인정된다.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는 사람에게 "그러게 자가 면역 관리 좀 잘하지 그랬어"라고 말하지 않듯 이제 비만인에게 보내던 비난의 눈초리는 세심한 진단으로 변했다. 살 빼는 약은 비만 '치료제'가 됐다. 전자는 식단과 운동을 견딜 의지가 없는 사람이 선택하는 꼼수지만 후자는 정당한 처방이 된다. 약을 먹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암을 이길 의지가 없어서 항암제를 처방받는 건 아니지 않은가!?
제약 BD라면 이점을 반드시 파고들어야 한다. 이미 있는 질병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건 민망할 정도로 정직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더 좋은 건 질병을 창조하는 것이다. 긴장과 소화불량, 게릴라성 똥마려움은 불안장애와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향후 10년 안에 질병이 될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단언컨대 '노화'다. 노화를 치료하겠다는 야심만만한 회사를 눈여겨보라. 당신에게 부와 영생을 가져다줄 테니까.
<신약의 전쟁>은 제약 BD가(Business Developer) 쓴 책이다. 단순히 제약 산업을 소개하는 걸 넘어 약의 기전과 무려 무려 BD 실무지침서까지 담았다. 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약의 기전이 훨씬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데다 내용도 어렵지 않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어떤 회사가 생산에 강하고 또 어떤 회사가 신약 개발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건 덤이다. 회사명이 그대로 나온다.
2024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는 알파고의 창조주 데미스 하사비스였다. 구글의 제미나이 개발을 총괄하며 남는 시간에 취미 삼아 연구하던 결과물이 이뤄낸 성과였다. 그의 연구는 제약 업계를 송두리째 뒤집어놨는데 수년에 걸치던 단백질의 구조 규명을 몇 분 만에 밝힐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약의 기전은 단백질의 구조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제약회사는 데미스 하사비스의 도움을 받아 치료제의 후보 물질을 손쉽게 찾을 수 있게 됐다. 하사비스는 2억 개에 달하는 단백질의 구조를 모두 밝혀 무료로 배포했다.
그러니 여러분이 AI에 투자하겠다며 팔란티어나 앤트로픽, 스페이스X만 보고 있다면 이 쪽으로도 눈을 돌려보기 바란다. 제약과 AI는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제약 회사와 그런 제약사에 AI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원래 이런 얘기를 하려고 시작한 글은 아니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자꾸 이런 쪽으로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