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종교재판들이 책을 태우는 것도 헛일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 P10
십오 대에 걸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써온 나라에 사는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독서로 인해 영원히 내 잠을 방해받고 독서로 인해 섬망증에 걸리기 위해서다.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가 반드시 신사이거나 살인자일 필요는 없다는 헤겔의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하기 때문이다. - P12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사고하는 인간 역시 인간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내 손 밑에서, 내 압축기 안에서 희귀한 책들이 죽어가지만 그 흐름을 막을 길이 없다. 나는 상냥한 도살자에 불과하다. 책은 내게 파괴의 기쁨과 맛을 가르쳐주었다. - P12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P18
소장이 소리지르고 양손을 비틀며 협박해대도 나는 내 지하실을 빠져나와 발길 닿는 대로 다른 지하 세계들을 찾아간다. 그중에서도 중앙난방 제어실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보러 가는 게 가장 즐겁다. 개들이 개집에 매여 있듯이 일에 매여 있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을 통해 배운 것들을 가지고 동시대 역사를, 그러니까 일종의 사회학적인 앙케트를 쓴다. 극빈층이 점점 줄고 있다는 것과 하층 노동자들이 교육을 받게 된 한편으로 대학 졸업자들이 이 노동자들을 대체하고 있다는 것도 그곳에서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단연 하수구 청소부들이다.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두 사람은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 대한 책을 쓴다. 포드바바 하수처리장으로 흘러드는 배설물이일요일과 월요일에는 판연히 다르다는 걸 내게 가르쳐준 것도그들이다. - P36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변증법의 논리대로 승자가 다시 두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도 그 고매한 하수구 청소부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기체나 금속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투쟁을 통해 생명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분열을 겪듯이 말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가 이루어지며, 세상이 통째로 휘청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않는다. 정신의 투쟁 역시 여느 전쟁 못지않게 끔찍하다, 라고 한랭보의 말이 적확하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 P37
그렇게 걸어가노라니, 대학을 나온 한 운전기사의 말이 떠올랐다. 동유럽은 프라하의 문전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고전적인 옛 역사가 더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그러니까 그리스 정신이 진동하는 고막 맨 끝자락, 갈리시아의 어딘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프라하의경우, 건물들의 정면이나 주민들의 머릿속이 그리스 정신으로 넘쳐난다면, 그건 오로지 수많은 체코인들의 뇌를 그리스와 로마로 가득 채우는 인문고등학교와 문과대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도의 하수구에서 두 패로 나뉜 쥐들이 서로 밀어내며 어이없는 전쟁을 벌이는 동안, 추락한 천사들이 각자의 지하실에서 일하고 있다. 전투에서 패한 교양인들이다. 한 번도 이 전투에 가담한적이 없지만 세상을 완벽히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다.- P39
각각의 정육면체들은 푹푹 찌는 여름날 정오에 시골 푸줏간 갈고리에 걸린 소의 커다란 넓적다리를 연상시켰다. 눈을 든 순간, 예수와 노자가 사라지고 없다는 걸 깨달았다. 터키옥색과 붉은색 치마를 입은 내 집시 여자들처럼 그들도 흰 회칠이 된 계단을 올라가버렸고, 내 맥주 단지는 비어 있었다. 나는 절뚝거리거나 때로는 한 손으로 짚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너무 시끄러운 내 고독 탓에 머리가 좀 어질어질했다. 뒷골목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쐬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손에 든 빈 단지를 꽉 움켜잡았다. 반짝이는 대기 속에서, 마치 햇빛이 소금기를 머금기라도 한 듯 나는 두 눈을 깜박이며 성삼위일체 성당 사제관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토목공들이 도로를파헤쳐놓은 곳이었다. - P60
자비로운 자연이 공포를 열어 보이는 순간, 그때까지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 이 모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온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이 일을 하면서 전능의 무한한 영역에 내던져졌음을 깨닫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 P75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