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로
네 속에 남은 한줌의 삶
흔쾌히 베어먹는다- P10
때로는
아주 오래된 지도
지구가 둥글다는 걸 몰랐던 시절의 지도
때로는 그런 지도 위에서 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지구가 끝나는 곳이 두 눈에 보이고
그곳으로 곧장 걷고 또 걸어가기만 하면
그 끝에 가닿을 수 있는
그래서 다시는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는
뛰어내리기만 하면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하염없이 떨어지다
결국
무(無)가 되는- P16
16페이지 이어서------
무한이 되는
때로는 그런 지도 위에서 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P17
읽어줘요. 제발
마르크스가 죽은 해 카프카는 태어났지만
카프카가 죽은 해 나는 태어나지 못했어요
입 밖에 내지 못할 어둠 속에 그냥 누워서
입속에서 죽어버린 내 사랑만 탓하고 있었어요
마음 던질 시간도 없이
마음 모을 시간도 없이
날마다 마음에다 벼랑만 쌓았어요
노란 튤립처럼 머리를 꼭 닫고 있었어요
서로 뒤얽힌 운명처럼 뒤얽힌 머리로 뭘 하겠어요?
생에 침을 뱉고 그 속에 꼭꼭 숨어서
금방 구워낸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두 눈 속에 빠뜨린 태양만 쪼아대고 있었어요
아무리 나를 아끼려고 해도
무수히 발길질해대는 내 자궁 안의
불온한 버릇
-----계속해서 읽어줘요. 제발
타버린 그대 마음속 지독한 탄내 같은 시집(詩集)!- P25
아무르장지도마뱀
나는 한때 사랑에 빠졌지요
녹색 넥타이를 맨 남자
언제나 발코니 끝에 서서
먼산 바라보듯 나를 바라보던 남자
나는 그게 남자들의 본성인 딴생각인 줄도 모르고내게 없는 큰 장점이라 생각하여
오랫동안 그 모습에 경탄하며 바라보았죠
그러다 아무르장지도마뱀을 발견했죠.
녹색 넥타이를 맨 그 남자와 너무나 닮은 도마뱀
침대나 식탁 위에선 분홍 혀를 날름거리며 온갖 아양을떨다가
궁지에 몰리거나 다급해지면
그 꼬리 잡힐까봐 마구 흔들어대다
급기야는 제 꼬리 댕강 잘라놓고 부리나케 도망치는 남자
나는 한동안 그 남자와 사랑에 빠졌지요
아무르장지도마뱀이 알을 까고 새끼를 어루만질 때 보이는
그 다정함과 늠름함이 너무 사랑스러워
내 발목이 퉁퉁 붓는 줄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만 부르는 귀뚜라미들을 잡아
그 남자 앞에 제물로 바쳤지요- P26
페이지 26의 시에 이어지는 페이지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그 남자가 맨 녹색 넥타이가 분홍 넥타이로 바뀌었을 때
나는 울면서 내가 키우던 도마뱀들의 꼬리를 모두 잘라
뒷산에 내다버렸지요
인간이 파충류와 사랑에 빠지다니!
아무르장지도마뱀 같은 그 남자는
이제 새 꼬리 분홍 넥타이를 매고
마치 자신이 아무르장지도마뱀이 아니라는 듯
온 마을 온 시내를 미끄러지듯 싸돌아다니고 있어요
아무리 잘라내고 또 잘라내도 다시 자라는
얄미운 도마뱀 꼬리 같은 분홍 넥타이를 매고
아주 신나게 아주 의기양양하게!- P27
벌거벗은 도시
나는 벌거벗은 도시에 산다
잠들 때도 혼자
깨어날 때도 혼자다
나는 혼자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오리엔테이션을 받는다
혼자를 둘로 쪼개고
둘을 넷으로 쪼개고
넷을 여덟으로 쪼개고...………
그런 노래를 작곡하고
그런 노래를 부른다
누군가가 죽고, 또 누군가가 죽고. 또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이 도시가 너무나 슬프고 아파
나는 혼자서 집을 짓고
운하를 만들고 교회를 세우고
마구간을 짓고 식품점을 연다
그러곤 내가 아는 이름들을 그곳에다 붙인다.- P44
44페이지에 이어서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때마다
그곳에선 불이 켜지고
달빛보다 환한 불이 켜지고
혼자가 둘로 쪼개지고
둘이 넷으로 쪼개지고
넷이 여덟으로 쪼개지고…………
내 안으로 모여들어 쌓이는
무수한 모래알들
나는 그 모래알들을 모아
다시 집을 짓고
운하를 만들고 교회를 세우고
마구간을 짓고 식품점을 연다
결코 끝난 적 없는, 끝이 없는
그런 도시를
혼자서 지어내고
혼자서 듣고
혼자서 노래 부른다- P45